“어때? 옛날처럼 마법을 좀 부려 볼까?” 환호하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찰스 왕세자’(도미닉 웨스트)가 말한다. ‘다이애나 빈’(엘리자베스 더비키)이 익숙하게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고요. 아주 까무러치게 해주죠.”
결혼 10주년인 1991년, 이 부부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자 언론은 ‘두 번째 허니문’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들이 탄 배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새로운 여왕처럼 믿음직하고 변함없는, 어떤 폭풍도 견뎌내는 새로운 배가 될 것”이라며 ‘브리타니아’로 명명한 왕실 요트. 겉으로 찰스와 다이애나는 세상 어느 부부보다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지만 대중의 눈에서 벗어날 때, 두 사람이 측근과 주고받는 대화는 이 결혼 생활이 이미 파탄 직전이라는 걸 넌지시 귀띔한다.
2억6000만달러(약 3400억원)로 알려진 기록적 제작비를 들여 엘리자베스 2세와 영국 왕실 이야기를 그려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크라운’이 지난 9일 다섯 번째 시즌을 공개했다.
미국 ‘방송의 오스카’ 에미상 시상식에서 시즌1부터 4까지 총 63부문 후보에 올라 상 21개를 받은 드라마. 특히 열광적 지지를 얻은 시즌4는 지난해 에미상 드라마 작품상, 남·여 주연·조연상 등을 휩쓸었다. 화려한 영국 왕실의 이면에 숨은 여왕과 왕족, 정치가들의 인간적 면모뿐 아니라, 허영과 위선, 실패와 고뇌까지 드러내는 적나라한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시즌5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컸다. 15일까지 닷새 연속 넷플릭스 시리즈 1위(플릭패트롤 기준)에 올라 있다.
공산권 붕괴와 홍콩 반환 등 격변이 영국과 세계를 휩쓰는 동안, 최악의 위기는 왕실 내부로부터 싹튼다. 찰스 왕세자의 불륜이 알려지며 대중은 왕실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이애나는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왕실의 흠을 폭로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이자 어머니로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야기는 세기말을 뒤흔든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새로 여왕을 맡은 이멜다 스탠턴에 대해 시리즈 창작자인 피터 모건은 “여왕이 가진 유약함과 강함을 모두 가진 배우”라고 했다. 여왕의 모범적 남편으로만 알려진 필립 공의 숨겨진 관계를 알게 됐을 때 보여주는 감정적 진폭, 폭풍처럼 몰아치는 내우외환 앞에서 꿋꿋이 입술을 앙다물 때의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 모두 놀랍다.
문학적이라 할 만한 서사 진행도 여전히 정교하고 고급스럽다. 다이애나빈의 폭탄 인터뷰는 평민들의 폭력 봉기 이야기와 겹쳐지고, 냉전 붕괴 시기 적국 남성 지도자를 다루는 여왕의 모습은 남편과의 문제에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의 주인공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빈.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알려진 사실에 충실한 드라마의 태도는 양날의 칼과 같다. 알려진 것보다 더 카리스마 있게 그려지는 찰스, 더 신경증적으로 유약해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사실에 충실한 묘사라 해도 낯설게 느껴진다. 좀 더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좀 밋밋할 수도 있지만, 이 비극은 워낙 현실 자체보다 더 극적이었다. 시리즈 팬들에겐 아쉬울 게 없는 다섯 번째 시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