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연(51) 시인의 서울 서초구 자택 다락방 천장에는 지난봄부터 손바닥 크기 구멍이 2개 뚫려 있다. 하나는 시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머리로 뚫었고, 다른 하나는 “왜 뚫리지? 설마 합판인가?”라는 의구심에 주먹으로 쳐 뚫은 것이다. 역시나, 합판이었다. 다락방은 2평 남짓 약 1m 높이의 협소한 공간이지만, 원태연 시의 자궁이다. 원 시인은 그때를 회상하며 “시를 다시 쓴 지 7개월이 됐는데, 20년 동안 안 써서 어떻게 쓰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머릿속의 시를 글로 적으면 매력이 없더라”며 “내가 나한테 욕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100여 편을 썼지만, 17편을 빼고는 모두 버렸다”며 “시에게 혼 많이 났다. 혼나도 싸다”고 했다.
시인의 신작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은행나무)가 출간됐다. 20년 만의 신작. 한 독자와의 약속이 집필 계기였다. 원태연은 2년 전 드라마 극본 작업이 물거품 되면서 기존 발표한 시에 일부 새 시를 엮어 시집을 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해서 낸 건데, 내가 그렇게 초라하게 시를 다시 쓸 줄 몰랐다. 그런데 30년 알고 지낸 독자로부터 그런 시집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고마워서 ‘단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시집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시집에는 원태연표 감성에 형식적 실험 등을 더한 시 85편을 묶었다. 그는 “스타일이 안 맞는 시는 있어도, 매력 없는 시는 없을 거다”라며 “오로지 매력 있게 보이기 위해 시를 다듬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묻는다. ‘전화가 옵니다/ 당신입니다/ 겁도 없습니다/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너에게 전화가 왔다’ 전문) ‘나는/ 머물기/ 좋은 장소입니까’(’너에게 나를 묻는다’ 전문). 언어를 덜어낸 끝에 이별의 앙상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외롭다’(‘나뭇잎 뜯기’ 전문) ‘끊어진다/ 마음/ 이’(‘버퍼링’ 전문)
원태연은 쉬운 언어를 활용한 사랑 고백의 언어들로 1990년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든 시인이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1992)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1993) 등 시집으로 약 600만부의 판매를 기록했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지만, 시가 지녀야 할 객관성보다 감상주의와 사랑타령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시집 ‘안녕’(2002)을 끝으로, 작사가로 변신했다. 백지영의 ‘그 여자’, 허각의 ‘나를 잊지 말아요’ 등이 그의 작품.
원 시인은 “나는 시집을 많이 팔았지만, 욕도 제일 많이 먹은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당시 문단에서 봤을 때 나는 족보도 없고, 그동안의 시와 다른 시를 썼으니 욕을 먹었을 거다”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얘기 들어도 짜증이 안 난다. 자신감이 없어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내가 싫다.”
그는 작사가, 영화감독 등 여러 직업을 거쳤지만, “나의 본질은 시”라고 말했다. “나에게 시는 ‘잃어버린 나’다. 이제 두 번 다시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계속 나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는 “내 시가 독자들의 마음을 제일 잘 알아주는 친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인은 “난독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독증이 심해 주로 유튜브로 시를 듣는다. 난독증은 증상이 다 다른데, 심각하질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엔 한국난독증협회 홍보대사를 맡았다. 이제는 공식석상에서 이 협회 홍보대사라는 걸 먼저 소개한다. 난독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
원 시인은 “목표는 30년 전 첫 시집과 같은 책을 내는 것이었는데, 시를 쓰는 내내 내가 예전과 같은 필력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마지막 시 ‘사랑의 순서’를 쓰며 그때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작사도 하고, 시도 계속 쓸 거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라.”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원태연은 문학적 평가와는 별개로, 대중이 선호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많이 팔리는 것은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접근할 수 있다”며 “위로와 위안, 공감의 감성을 적셔주는 말들이 어느 시대에나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