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장찬교씨가 간직하고 있는 부모님의 옛 도민증

경기 광주시 독자 장찬교(84)씨 지갑엔 부모님이 쓰던 1954년 전라남도 도민증(道民證)이 들어 있다. 도민증은 주민등록증을 도입하기 전 도별로 발급하던 신분증이다. 장씨는 “오래전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도 붙어 있어서 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도민증은 6·25전쟁으로 월남한 인구가 늘고 사회가 혼란하던 시기에 도입됐다. 모양이나 기재 내용이 도별로 조금씩 달랐지만 오늘날의 신분증보다 상세하고 엄격했다. 장씨가 간직한 도민증은 본적, 출생지, 주소, 호주(戶主) 성명, 소유자의 직업까지 적게 돼 있다. “상시 휴대하여야 하며” “취체(법률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관헌의 요구가 있을 때는 제시하여야 함”이라는 의무를 명기했다. 분기마다 경찰의 확인 도장을 받는 칸도 있다. 거동 수상자를 찾아내는 데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장씨는 “조계산, 지리산에 숨어든 인민군을 가려내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도민증을 발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장씨는 “아버지와 산에서 나무를 해 장에 팔았다”면서 “장터로 가려면 시내 길목의 경찰서에서 아버지가 도민증을 보여줘야 했다”고 기억했다. 도민증 없이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의심받기 좋은 시대였다.

1950~60년대 신문에는 간첩을 막는 도민증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도민증 제도를 유지하는 주요 근거가 간첩 색출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찰관이 도민증을 갱신하지 못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연행하는 일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시민 자유를 제약하는 도민증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꾸준히 나왔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도민증 폐지 계기는 북한 공작원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1968년 1·21 사태였다. 사건 직후 내무부가 도민증을 주민등록증으로 교체하는 법률 개정안을 마련했다. ‘최근의 긴장 사태’와 관련,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일제 등록을 통해 주민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불온 분자를 색출한다는 취지였다. 그해 10월부터 전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다. 11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호 주민등록증을 전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