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현진건 초상.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활약하느라 발표하는 작품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일보 1927년10월29일자

◇남구(南歐)의 시인같이 다정한 문인

‘빈처’ ‘운수좋은 날’ 등 교과서에 실린 소설로 이름난 빙허 현진건(1900~1943)의 별명은 ‘미남 기자’다. 만문만화가로 이름난 석영 안석주는 1927년 빙허를 이렇게 묘사했다. ‘씨(氏)는 본래 미남자이지만 ‘타락자’라는 소설 재료를 구하러 다녔을 때같이 아름다웠던 때는 없으리라.’(’만문자가 본 문인1-愛酒家 빙허), 조선일보 1927년10월29일)

‘타락자’는 1922년 월간지 ‘개벽’에 실린 빙허의 초기 대표작중 하나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타락과 좌절을 다룬 작품이다. 그런데 석영은 글과 함께 빙허의 인물 스케치를 실었다. 양복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배를 내민 ‘아저씨’다. 스물 일곱살 때의 빙허인데, 요즘 미남 기준과는 좀 다른 듯하다.

같은 해 빙허를 미남으로 소개한 기사는 또 있다. 소제목이 아예 ‘미남자 현진건씨’다. ‘빙허 현진건씨는 세상이 다 아는 미남자요, 미문가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체격이 고운 만큼 행동과 사상과 필치가 고운 것이니 씨는 과연 남구(南歐)의 시인같이 다정한 문인입니다.’(‘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매일신보 1927년4월17일) 낯간지러운 여성지 기사같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미남으로 치는 건 비슷하다. 이 기사는 빙허의 취미가 바둑이라고 소개한다.

현진건을 '미남자'로 소개한 매일신보 1927년4월17일자 기사.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었다.

◇현역 기자 때 발표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을 근대문학 초기 단편 소설 거장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빙허는 16년 가까이 신문·잡지 기자생활을 한 언론인이다. 대표작 ‘빈처’(‘개벽’ 1921년 1월) ‘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년 11월) ‘운수 좋은 날’(‘개벽’ 1924년6월) 모두 현역 기자 초창기 때 쓴 작품이다.

빙허는 1920년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주간지 동명과 시대일보·동아일보를 거쳐 1936년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사직당했다. 조선·동아·시대일보를 통틀어 사회부장만 10년 넘게 할 만큼 정통파 기자였다. 이 때문에 ‘그가 한번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처세하기 비롯한 때부터는 그에게서 작품이 귀하게 나왔다’(’만문자가 본 문인1-愛酒家 빙허)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1면 소설 '로 빙허 현진건의 창작소설 '효무'를 연재한다고 알리는 조선일보 1921년 4월27일자 사고. '진정한 창작이 드물고 표절작품이 성행하는 오늘날 이 신진 작가의 번뇌를 짜고 심혈을 뿌려 적막한 우리 문단에 심는 한송이 꽃'을 기대한다며 호기롭게 밝혔다.

◇첫 신문 창작소설, 1면에 연재

현진건 초기 단편소설이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잡지 ‘개벽’을 통해 나온 것은 앞서 본 것과 같다. 하지만 빙허가 ‘개벽’에 초기 대표작 ‘빈처’를 발표하기 직전인 1920년 11월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와 소설을 연재한 사실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빙허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신문 1면에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번역한 ‘초련’(12월2일~1월23일,총 44회), 역시 투르게네프 소설을 번역한 ‘부운’(1월24일~4월30일, 총 86회)을 썼고, 영국 작가 마리 코렐리의 ‘복수’를 번안한 ‘백발’(5월14일~9월30일)을 4면에 연재했다.

학계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현진건의 초기 번역·번안소설을 주목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백발’ 원작은 그간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막연히 추정돼왔다. 2012년에야 영국 작가 마리 코렐리 원작 ‘복수’(1886)가 원작이고 일본 작가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 ‘백발귀’(1893)를 저본삼아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황정현, 현진건 장편번역소설 ‘백발’연구, 한국학연구 42, 2012.9)

빙허의 첫 신문 창작 소설은 1921년5월1일부터 30일까지 조선일보 1면에 연재한 ‘효무’(曉霧)였다. 빙허는 1면에 창작 소설을 연재하면서, 동시에 4면에 번안소설을 실을 만큼 강행군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그의 첫 신문 창작소설 ‘효무’는 ‘작가 사정’으로 중도하차했다. 이 작품 연재는 2년 후 ‘개벽’에 속개됐다가 1925년 단행본 ‘지새는 안개’(박문서관)로 출간됐다.

근대극 선구자 현철. '개벽' 학예부장을 맡은 현철은 오촌 조카인 현진건이 개벽에 작품을 발표하도록 도와주고, 조선일보 입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숙인 ‘개벽’ 학예부장 玄哲 지원 받아

현진건은 1920년 ‘개벽’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단했다. 번역소설 ‘행복’(개벽 3호, 1920,8), ‘석죽화’(개벽 4호, 1920,9)에 이어 창작 단편 ‘희생화’를 발표했다.(개벽 5호, 1920,10) 변변한 경력이 없는 빙허가 개벽에 매번 글을 싣게 된 데는 당시 ‘개벽’ 학예부장을 맡았던 당숙 현철(玄哲)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메이지대법과에 유학하던 현철은 1913년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가 이끌던 극단 예술좌(藝術座) 부속 연극학교에 들어가 4년간 연극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1920년부터 ‘개벽’에서 일했다.

빙허의 학력은 일본 도쿄 세이조(生城)중학 4학년 중퇴에 상하이 호강(滬江)대에서 독일어를 배웠다는 게 전부다. 이런 경력의 빙허가 신문사에 어떻게 입사했을까. 현철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보는 의견이 강하다. 현철은 ‘개벽’을 중심으로 당대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조선일보에도 ‘현당극담’(1월24일~4월 21일·총 77회)이라는 연극 평론을 매일같이 쓴 주요 필자였다.

◇첫 월급 60원, 고향 보내고 책 사

현진건은 조선일보 입사후 첫 월급 받은 소감을 1927년 월간지 ‘별건곤’에 회고한 적 있다. ‘내가 스무살 나던 때 겨울에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간 것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나의 첫 취직인 동시에 그 때 그 수입이 첫 수입입니다. 즉 11월말일인가 봅니다. 봉투를 한 장 내주기에 월급인가 보다 하고 돌아서 뜯어 보니까 10원짜리 여섯 장이 들었습니다. 초급하고는 꽤 많았습니다. 어찌도 기쁘던지요. 그래 그 돈을 가지고 나와 20원인가 얼만가 시골집에 보내고, 책 10원어치 사고, 그리고 기쁜 김에 동무들과 같이 한잔 톡톡히 한 듯합니다.’

여기서 1920년 11월에 조선일보에 입사한 사실과 당시 첫 월급으론 꽤 많은 60원을 받아 기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있다. 1920년 당시 초봉 60원은 웬만한 샐러리맨 월급 2배일 만큼 꽤 많은 액수였다.

◇빙허의 조선일보 재입사는 1926년 4월 이전

현진건의 유학과 이후 경력 중엔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대목이 있다. 1921년말 조선일보를 떠나 최남선이 주재한 주간지 ‘동명’과 시대일보에서 일한 것은 사실이다. 학계에선 대부분 빙허가 1926년 8월 시대일보가 폐간된 이후 동아일보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왔다. 동아일보로 옮기기 전, 조선일보에서 다시 근무했다는 언급도 있지만 근무한 시기나 그 근거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박현수, 문인-기자로서의 현진건, 299쪽, 반교어문연구 42, 2016) 박현수는 동아일보사사원록 약력을 근거로 빙허가 1926년 시대일보를 그만두고 같은 해 조선일보사로 옮겨간 후 1927년 8월 사직했다면서 시대일보가 폐간된 1926년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조선일보에 1년 정도 근무한 것으로 봤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에 ‘현진건’을 키워드로검색하면, 늦어도 1926년 4월엔 이미 조선일보에 재직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1926년 4월18일자 조선일보에 빙허 조모상 부고가 조선일보 에 실렸는데, 그를 ‘본사 기자’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빙허는 사회부 기자를 거쳐 그해 후반 사회부장을 맡았다. 기사 제목을 잘 뽑는 명편집자로 소문났다. 매일신보(’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1927년4월17일)를 통해서도 빙허가 1927년 사회부장을 맡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일장기 말소사건과 죽음

빙허는 1927년 10월 동아일보로 옮겼다가 1936년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16년 가까운 기자 생활을 강제로 마감한 것이다. 그는 조선, 동아, 시대일보 민간지 3사의 사회부장을 거친 민완기자였다. 하지만 신문사를 떠난 이후 빙허의 작품 활동과 인생은 순조롭지 않았다. 양계장을 운영하며 미두(米豆)에 투자했다가 가산을 탕진했고, 폭음끝에 1943년 폐결핵으로 숨졌다.

◇참고자료

현진건, ‘첫 수입받든 때 이약이’, 별건곤 제4호,1927,2

‘취미는 바둑, 필치는 정염’, 매일신보 1927년4월17일

박현수, 문인-기자로서의 현진건, 반교어문연구 42, 2016

박현수, 1920년대 전반기 조선일보와 현진건, 대동문화연구 88, 2014,12

최성윤, 조선일보 초창기 연재 번역·번안소설과 현진건, 어문논집 65, 2012

황정현, 현진건 장편번역소설 ‘백발’연구, 한국학연구 42, 2012,9

박현수, ‘효무’ 해제: 새벽안개, 서광을 가린 혼돈의 세계, 민족문학사연구 45,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