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박서보(92)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화가는 당시 페이스북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쓰고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지난 6월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매일 내 몸이 약해지고 있는 걸 체감한다. 무릎이 꺾이고 손이 떨려 연필 선이 달달거리는 심장 초음파 선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1950년대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해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단색화에서 박서보 화백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청년 박서보는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 “홍대 다닐 때, 김환기 선생 권유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극소수 작품 빼고는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같이 보이더라. 분기탱천한 20대라 한탄을 했다. 일제강점기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세대로서 어떻게 그림이 저렇게 저항 정신이 없을 수 있냐고.” 19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열고, 반(反)국전 선언문을 전시장 문 앞에 붙였다. 화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 후에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큰소리치고 나면 책임을 지려고 더 세차게 노력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단색화 초기를 상징하는 ‘연필 묘법’ 연작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었어요.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요. 옛 선비들이 할 일 없어서 사군자를 친 게 아니에요. 정쟁으로 피폐해진 자아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친 겁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맑게 걸러져요.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다가갔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이 없어 고민이 깊었어요.”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놓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짜증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어 만든 작품”이 최초의 연필 묘법인 ‘Ecriture No. 6-67′이다. 그는 “친구인 화가 이우환이 우리 집에 와서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좋다고 해서, 그의 주선으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며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라고 꼽았다. 그의 그림 중 최고가 작품도 연필 묘법이다. 1975년 작 ‘묘법 No. 37-75-76′이 지난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60만달러(약 35억원)에 팔리면서 최고가를 기록했다.
생전 일기장 50여 권을 남겼다.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꼽았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의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나이 들어 가면서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며 “그날 겪은 사실의 기록일 뿐이어서 건조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이니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계는 “최근 프리즈 아트페어 현장에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을 정도로 의욕적으로 활동을 해왔는데 안타깝다” “미술계 거목이었던 화백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를 표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