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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프라이팬보다 밀도 높은 참숯으로 구웠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참나무 성분이 고기에 배면서 ‘불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캠핑장에서 ‘불멍’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기도 합니다. 모닥불에서 나는 짙은 나무 냄새만 맡아도 몸이 나른해지고 치유되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불로 인류의 문명을 일군 인간의 본능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본능은 위스키 제조까지 이어졌습니다. 위스키에 불맛을 입힌 것입니다. 코를 잔에 대는 순간 바닷가에서 피운 장작 연기에 은은하게 구운 과일이 연상됩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으면, 바다의 소금기를 담은 연기와 함께 달콤하게 구워진 과일들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합니다. 목 넘김은 물보다 부드럽습니다.

명작 반열에 오른 위스키, 라가불린 16년. /김지호 기자

아일라 위스키의 정수 ‘라가불린 16년’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 마이클 잭슨의 저서(Malt Whisky Companion)에서 최고 평점을 받으며 명작 반열에 오른 위스키입니다. 이 책에서 최고점을 받은 또 다른 위스키는 맥캘란 25년과 30년입니다. 가격이나 숙성 연도의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충격적인 평가입니다. 평소 스페이사이드 위스키를 즐겨 마셨던 그가 아일라섬 위스키인 라가불린에 가장 높은 점수를 매겨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을 뒤덮고 있는 자연 퇴적층인 피트(Peat, 이탄). /게티이미지코리아

아일라 위스키 불맛의 비밀은 피트(Peat, 이탄)입니다. 피트는 아일라섬을 뒤덮고 있는 자연 퇴적층으로 ‘축축한 석탄’과 흡사합니다. 이 피트를 태워 맥아를 말리는 과정에서 강한 훈연향이 배어들게 됩니다. 훈연향은 그대로 스피릿까지 이어져 해조류의 짭조름한 맛을 끌어내며 아일라 위스키의 매력을 완성합니다. 피트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훈연향이 요오드나 ‘병원 냄새’ 혹은 지사제인 정로환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초심자를 상대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도 단번에 아일라 위스키임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합니다. 그중에서도 ‘아일라의 왕’으로 불리는 위스키가 있습니다. 바로 ‘라가불린’입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피터 매키(Peter Mackie)

라가불린의 역사는 17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라가불린은 게일어로 방앗간이 있는 분지를 의미합니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섬 남단, 킬 돌턴 해안에 있는 증류소는 불법으로 밀주를 생산하던 농장이었습니다. 농장이 섬에 있는 곳이다 보니 밀주 단속반의 눈을 피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농장주인 존 존스턴은 1816년 정식으로 주류 허가 면허를 받고 1825년 사업 확장을 위해 폐쇄돼 있던 인근의 아드모어 증류소를 인수합니다. 1836년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고 글래스고의 주류상인 알렉산더 그레이엄이 증류소를 인수하는데 이듬해 두 증류소를 합병하면서 지금의 라가불린 증류소가 탄생합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지만, 1890년대 증류소를 인수했던 피터 매키(Peter Mackie)가 조종간을 잡으면서 라가불린의 인기는 급상승합니다.

그는 화이트 홀스(White Horse)라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주재료로 라가불린을 사용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습니다. 1908년에는 영국 왕실 보증서인 로열 워런트와 그랑프리를 두 번이나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화이트 홀스는 당시 에든버러에 있는 여관의 이름에서 따왔고, 간판에 있던 백마 그림을 라벨로 사용했습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부유한 모던 보이들이 즐겨 찾던 경성의 카페와 바에서 ‘백마표’ 위스키란 이름으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스카치위스키 역사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 중 하나로 뽑히는 피터 매키(Peter Mackie). /위키피디아

피터 매키는 스카치위스키 역사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당시 작가인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Robert Bruce Lockhart)는 매키에 대해 천재, 과대망상증, 괴짜의 혼합체로 묘사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피터(Restless Peter)’라는 별명을 지어줍니다. 이 무렵 위스키 재벌 조니워커 가문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어쩌면 경쟁자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심적 압박감에 안절부절못하던 그에게 붙여진 별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피터는 옆 동네 라프로익과 ‘물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라프로익 증류소와 ‘물 전쟁’

피터 매키는 라가불린에서 2㎞가 채 안 떨어진 라프로익 증류소의 원액을 사들여 블렌딩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새로 취임한 라프로익의 매니저 이안 헌터(Ian Hunter)는 자신들의 원액이 너무 싼 값에 넘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합니다. 오랜 기간 라프로익과 거래를 해온 피터 매키의 회사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법정이 매키의 손을 들어줬지만 1907년 라프로익과의 계약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면서 상황은 역전됩니다.

당시 판결에 불만을 품었던 피터 매키는 라프로익 수원지인 킬브라이드(Kilbride)의 물길을 바위로 막아 증류소로 들어가는 물 공급을 차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결국 법정에서 제지됐고, 피터 매키에 의해 강제로 막혔던 물길은 다시 뚫리게 됩니다. 라프로익은 피터의 이런 괴짜다운 모습에 질려, 수원지 인근의 땅을 전부 매입해 혹시 모를 그의 또 다른 만행을 원천 차단해버립니다.

하지만 매키가 이대로 물러났으면 괴짜라는 별명이 붙지도 않았겠지요. 그는 라프로익 증류소의 핵심 기술자를 빼 오면서 라가불린 증류소 안에 라프로익과 똑같은 설비를 갖춘 몰트 밀(Malt Mill)이라는 증류소를 차립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똑같은 제조법으로 스피릿을 뽑고 숙성시켜봐도 라프로익과 똑같은 맛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62년에 문을 닫은 몰트 밀은 현재 증류소 방문객 센터와 관리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24년 피터 매키가 세상을 떠나면서 회사 이름은 매키(Mackie & Co)에서 화이트 홀스 디스틸러스 리미티드(White Horse Distillers Limited)로 변경되고 1927년 현재의 디아지오(Diageo)에 인수됩니다. 라가불린 증류소는 1941년 2차 대전으로 문을 닫고, 1951년에는 화재로 증류소 상당 부분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플로어 몰팅(사람이 일일이 삽으로 맥아를 뒤집는 전통 방식)을 중단하고 인근의 포트 앨런 증류소에서 맥아를 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가불린 16년의 탄생

장작에 구운 과일맛이 인상적인 라가불린 16년. /김지호 기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라가불린 16년은 1980년대에 그 첫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위스키 평론가 마이클 잭슨이 최고 점수를 줬던 제품도 이 무렵에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1980년대 출시된 제품과 현재 제품의 맛 차이가 크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플로어 몰팅의 유무와 원액으로 인한 차이로 판단됩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라가불린 16년 초창기 제품들은 100만원이 훌쩍 넘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맛이 좋아도 16년 숙성 제품에 100만원을 넘게 쓰기에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최근 출시된 제품들도 충분히 맛있어서 누군가에게는 ‘인생 위스키’로 꼽히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대표 주당 조니 뎁도 금주 기간에 라가불린의 향만 맡으면서 무료함을 달랬다고 합니다.

공식적이진 않지만, 라가불린 16년은 버번 위스키를 담았던 오크통과 셰리 오크통에서 숙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훈연향 뒤로 은은한 꽃향기와 부드러운 과일 맛이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알코올 도수 43%의 라가불린은 다른 아일라 위스키에 비해 피트가 부드러운 편입니다. 일반적인 스카치위스키는 10~12년 숙성 제품들이 엔트리급으로 분류되지만, 라가불린의 경우 16년부터 시작됩니다. 오크통에서 16년 세월을 견뎌내며 피트 강도가 순해진 셈입니다.

‘피트(Peat)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라가불린의 수요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때 국내에서 품귀 현상까지 빚으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던 라가불린 16년이 최근 수입사의 가격 인하와 안정적인 원료 공급으로 가격 측면의 경쟁력까지 갖추게 됐습니다. 물론 마이클 잭슨이 평가했던 제품은 아니지만, 여전히 밸런스 좋은 입문용 피트 위스키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라프로익의 찌릿찌릿하고 강력한 피트가 부담스러웠다면, 라가불린은 좀 더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장작이 타는 스모크 계열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가불린이 여러분들의 ‘피트 진단 키트’ 역할을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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