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에선 미성년자 성매매를 알선하는 포주, 이선균 주연의 영화 ‘잠’에선 영험한 신령을 중개하는 무속인, 최민식 주연의 ‘카지노’에선 돈 들고 튄 다단계 업체 사장, 티빙 드라마 ‘LTNS’에선 연하남을 농락하는 양다리 유부녀.

천변만화하는 역할을 능청스럽게 소화하는 배우 김금순(51)은 ‘지천명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정순’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연기해 지난해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정순은 공장에서 일하다 만난 동료 남성을 좋아하게 되지만, 남성의 잘못된 행동으로 일상이 수렁에 빠진다. ‘정순’은 김금순의 열연에 힘입어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대만금마장영화제 등 영화제 19곳에 초청됐다. 지난 1월에는 영화 ‘울산의 별’에서 억척스러운 조선소 노동자로 변신했다. 이 역할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최근 서울 동대문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금순은 “소처럼 일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런 날이 왔다”며 “어떤 역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달려갔던 지난 시간이 쌓인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에서 자랐다. 그의 숨은 끼를 발견한 사람은 선명여중 국어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작은 아씨들’ 연극을 준비하던 선생님은 그에게 맏이 메기 역을 맡겼다. 무대의 맛을 알게 된 김금순은 졸업 후 배우가 되겠다고 나섰다. 모친은 “이 가시나 미칬나”라며 머리채를 잡았다. 굴하지 않고 배역을 찾아 상경한 김금순은 현대뮤지컬극단에 들어갔다. 윤복희가 주연한 ‘피터팬’ 마지막 공연은 코러스 역으로 함께했다. 이윤택 연출의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연극 ‘불의 가면’에서 왕의 애첩으로 수개월을 살았다.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건너간 때가 2002년. 10년 만에 귀국해 다시 연기에 뛰어들며 새 인생이 시작됐다. “제가 연극영화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현장이 학교라는 생각에 작은 역이라도 주연이라 여기고 적극적으로 맡았어요.”

지난달 개봉한 영화 '정순'의 주연을 맡은 김금순은 "돌덩이 같은 소재를 사랑스럽게 풀어낸 시나리오에 반했다"고 말했다. /더스쿱디스트리뷰션

그에게 역할 제의가 끊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운이 아니다. 그는 한두 컷 치고 빠지는 단역을 맡아도 인물의 생애 전체를 연구한다. 실화에 바탕을 둔 ‘카지노’의 다단계 사장 때는 그 인물이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는 물론 어떤 유치원에 다녔을지까지 구체적으로 그려봤다. 김금순은 “한순간에 캐릭터가 생생하게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잠시 등장할수록 인물 분석을 더 깊이 한다”고 말했다.

단역이라 할지라도 작품 목록이 쌓이다 보니 뜻밖의 인연이 생겼다. 영화 ‘브로커’ 출연도 고레에다 감독이 그가 출연한 단편 영화를 보고 선택했다고 한다. “단역이나 조연만 하다 보면 한계를 느끼지 않나”라는 질문에 “한계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경계를 그어뒀을 때 느끼는 것”이라며 “새 역할은 아무리 작아도 배움이고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2′ 등 여러편 대기 중이다. 찜질방 때밀이, 바람난 남편과 상간녀를 찾으러 나선 중년 여성 역도 있다. 최근 배우 고두심과 같은 드라마 촬영을 하다 갱년기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고두심에게 “힘든 갱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으니 “야, 그런 거 생각할 정신이 어딨어, 일해야 되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두심은 “머리가 좀 아프네, 뒷골이 좀 땅기네, 그러다 갱년기를 알게 모르게 지나쳤다”며 “일하는 게 최고”라고 조언했다. 김금순은 “앞으로도 소처럼 일하는 게 모든 고비의 명약일 것 같다”며 “아줌마 액션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훈련해서 나오는 액션이 아니라 아줌마라서 가능한 본능적인 액션을 해보고 싶어요, 영화 ‘올드보이’의 장도리신 같은 액션이 욕심납니다. 저요, 아주 잘할 자신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