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출간 당일인 지난 15일, 조선일보미술관 인근에서 소설가 김기태를 만났다. /이태경 기자

한국 소설계에 주목할 만한 남성 신예가 나타났다. 주인공은 소설가 김기태(39). 등단 3년 차인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우수작으로 뽑혔고, 이상문학상 후보로 두 번이나 올랐다. 문학과지성사 ‘이 계절의 소설’에 이미 세 차례 선정됐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 여성 평론가들도 김기태를 좋아하네.” 여성의 목소리가 주목받는 요즘 경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출간을 계기로 그를 만났다.

어떤 소설을 쓰는 작가인지 묻자 그는 “통속소설 쓰는 사람이에요”라며 웃었다. 소설가는 “내가 너무 동시대와 바짝 붙어 있나” 고민했지만, 곧 “체질이 그런 걸 어쩌겠나” 결론 내렸다. “제가 지금 이 사회에 포박(捕縛)돼 있잖아요.” 2020년대의 세태소설가. 그게 그의 강점이다.

단편 ‘롤링 선더 러브’는 연애 예능을 소재로 한다. 그도 ’나는 SOLO’ 애청자라고 밝혔다. 서른일곱 조맹희는 ‘시원하게 굴러보고 싶다’며 ‘솔로농장’ 출연을 결심한다. ‘사랑을 찾는 솔로들의 흙맛 나는 고군분투!’ 감자, 배추, 완두 등 열두 채소가 짝짓기하는 프로그램. 맹희는 술 몇 잔에 악플과 주변의 숙덕임을 훌훌 털어낼 수 있는 씩씩한 인물이다. 김기태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고 불편한 상황으로 뛰어드는 출연진의 용기에 시원하게 기립박수 한번 쳐 주고 싶어 쓴 소설”이라고 했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20대 청춘 이야기.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대형 마트에서 주5일, 35시간 근무하는 권진주는 사람들이 ‘쏜살 배송’으로 주문한 물건을 매장에서 찾아 담는 일을 한다. 재외 동포 4세대인 김니콜라이는 공장에서 하루하루 일하지만, 한국 영주권을 얻기 위한 연소득 3800만원은 먼 미래다. 둘은 원룸에 누워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묻는다.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금발 머리 소녀가 앙칼진 표정으로 소리친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독일 시인 브레히트의 시에서 시작된 밈의 유래를 따라가다 사회주의 운동가요 ‘인터내셔널가(歌)’를 틀기까지 이른다. 물론 두 청년에게는 이조차 일종의 밈이다. ‘내가 바로 뇌빨간 사춘기다’ 같은 식. 둘에게 밈은 ‘친한 사이’를 가능하게 하는 느슨한 연결고리다.

김기태는 "다음 소설은 '밈' 이런 거 하나도 넣지 말고 진짜 클래식하고 섬세하게 써야지 다짐해도 잘 안 된다"며 웃었다. /이태경 기자

왜 인터내셔널가를 소환했을까. 김기태는 “가장 많은 사람을 꿈꾸게 하고, 또 다치게 한 노래라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래가 아닐까 한다”라고 했다. “사람은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 써야 한다.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된 자유일까….” 그는 할 말이 많았다.

사람이 북적이는 소설집이다. 그는 “기차역의 대합실, 공항의 출입국장처럼 사람이 와글거리는 느낌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했다. 마지막 단편 ‘팍스 아토미카’는 ‘작가의 말’을 대체한다. 말미에 ‘위태로운 우애’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세상은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 같아요. 좁은 버스 안에서 어깨도 스치고, 부딪치고, 발도 밟는데, 비슷한 신세끼리 우애를 갖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와중에도 기어코 못된 짓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위태롭죠.”

그는 “영양제 조금 먹고 맥주 많이 마시는 사람” “루틴한 직장 다니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소설이 온당하게 읽히기 위해서라도 작품 뒤에 있고 싶다”고 했다. 은둔 작가도 고민했지만, 약간 타협했다. “많은 독자에게 책이 닿으려면 저도 이 세상에 뭘 줘야죠. 제 소설 인물들을 보면 극단으로는 치닫지 않잖아요. 그런 유연한 체질이 제 안에도 있나 봅니다.” 앞으로 그의 ‘체질’은 어떻게 가다듬어질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