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선 비만 내렸어. 뼛속까지 다 젖었어….’ 소설가 김애란(44)은 2011년 펴낸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에서 한국 인디 밴드 검정치마의 노래 ‘Antifreeze’를 호출했다. 열일곱에 아이를 가진 어린 부모와 조로증을 앓는 소년의 이야기. 뼛속까지 적시는 촉촉한 소설이다. 이를 추억이라도 하는 듯, 김애란의 신간 장편소설 간담회 날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2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등단 23년 차 ‘젊은 거장’ 김애란은 두 번째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출간을 기념해 기자들과 만났다. 소설 단행본 기준으로는 소설집 ‘바깥은 여름’ 이후 7년 만, 장편소설은 13년 만이다. 독자들은 손꼽아 기다렸다. 27일 출간 예정인 소설은 이미 예약 판매만으로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김애란은 이번 소설에서 ‘가족’을 새롭게 본다. 소설가는 “피로 연결된 끈적끈적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써왔다. 하지만 그 끈적끈적한 점성이 건강하지 못할 때도 있고, 심지어 끔찍할 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어려운 순간 힘이 돼 주는 이들을 이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사진은 2019년 7월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내고 본지와 인터뷰한 소설가. /이태경 기자

“출판사에서 ‘젊은 거장’이라는 수사를 써주셨지만, 저에게는 교복 같은 말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복 맞추면 3년 내내 입으라고 일부러 크게 맞추잖아요. 몸을 맞춰가라고, 더 커지라고 격려처럼 선물 주신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는 긴장한 듯 새초롬해 보였지만 말문을 열면서 표정이 풀어졌다.

2002년 그가 문단에 처음 등장했을 땐 ‘김애란 신드롬’이 일었다. 2000년대 문청들 사이에서 그의 소설은 전공 필수 서적과 같았다. 다작(多作)하지 않아 독자를 애태우는 게 흠이라면 흠. “어둡고 힘겹고 서글픈 인생의 사건들을 언어 안에서 거르고 간종여 담백한 음미와 잔득한 성찰의 장소로 재탄생시킨다”(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는 평을 듣는다. 신중하게 전력 질주하는 것이다. “제가 생산성이 비교적 낮은 작가임에도 반겨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그저 감사합니다.”

21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김애란의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 /조인원 기자

어느덧 40대 중반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김애란은 “소설 쓸 때 에너지의 종류가 바뀌었다. 예를 들면, 화력발전소에서 수력발전소로 바뀐 느낌”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제 경험이나 기억을 태워서 그 힘으로 글을 썼다면, 수력 발전이 물의 낙차를 이용하듯 저도 경험의 시차, 위치 변화 등을 에너지로 삼습니다.”

이번 장편 집필에는 3년 반이 걸렸다. 소설가는 “첫 장편에서 다룬 주제인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변주이자 뒤집어진 성장소설”이라고 신작을 소개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세 아이가 잊을 수 없는 어느 한 시기를 함께 통과해 나간다. “무언가를 그만두는 과정에서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내 고통만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상처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소설가는 “성장이란 시점 바꾸기”라고 했다.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하지만, 상처 입히기도 하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자리가 더 커지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소설의 외피를 썼지만, 김애란이 그리는 삶은 대체로 비정하다. 작가의 말엔 이렇게 썼다. “삶은 가차 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힌다.” 김애란은 “상처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삶의 기본값이다. 인간은 늘 무언가 잃어가면서 산다”고 했다. “초기에는 농담·유머·환상으로 이를 풀어내려 했다면, 어느 순간 농담이 불가능한 고통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소설의 도구를 다시 들여오는 시기도 있어요. 이번 장편에는 환상적인 요소를 넣어봤습니다.”

그간 써온 단편과 지금 쓰는 단편을 추려 머지않아 소설집을 발표할 계획도 알렸다. 어머니의 식당 앞에서 검은 개를 보고 엉엉 울자 어머니가 부리나케 식칼을 들고 뛰어나온 유년기의 기억은 초창기 단편 ‘칼자국’(2007)으로 쓰였다. 최근엔 간병에 대한 단편을 쓴다. “이제 내가 부모 앞에서 칼을 들고 검은 개를 내쫓아야 하는 상황이 됐구나. 때로는 우리가 서로에게 검은 개가 되기도 하는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고 씁니다.”

☞김애란(44)

한예종 극작과 4학년 때인 스물두 살에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한때 별명은 ‘앙팡 테리블’. 무서운 아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젊은 작가가 받을 수 있는 대부분 상을 받았고 이상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받으며 중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송혜교 주연 영화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