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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입구부터 어깨선까지 흘러내린 빨간 왁스. 첫 대면에 왁스를 어떻게 벗겨야 할지 당혹스럽습니다. 왁스 부분을 머리끄덩이 쥐어 잡듯이 당겨가며 차력 쇼를 펼치는 사람. 왁스를 녹이겠다며 불과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병 입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살짝 튀어나온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만 슬슬 당겨주면 봉인은 자연스럽게 해제됩니다. 입문용 버번을 말할 때 흔히 언급되는 미국 켄터키주의 ‘메이커스 마크’ 이야기입니다.

메이커스 마크의 상징, 붉은 왁스. /김지호 기자

태생이 미국인 버번은 주원료가 옥수수입니다. 스카치 못지않게 규정도 꽤 엄격합니다. 옥수수 함량이 최소 51% 이상 들어간 증류액을 62.5도 이하로, 오크통 내부를 불로 그을린 새 오크통에 담아 숙성해야 합니다. 증류 시 알코올 도수는 80도를 넘기지 말 것. 물 이외에 그 어떤 색소나 첨가물도 넣을 수 없고 최종 병입 시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버번 애호가들이 설정한 ‘엄격한 기준값’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화끈하게 도수가 높거나, 숙성감에서 오는 복합미와 매끄러움을 가졌거나.

◇붉은 왁스 장식의 핸드 메이드 증류소

메이커스 마크의 역사는 1953년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인 새뮤얼스 가문의 6대손인 빌과 그의 아내 마지 새뮤얼스로부터 시작됩니다. 선대들이 금주법 이후 매각한 증류소를 매입한 빌.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다짐한 빌은 17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레시피를 불로 태워버립니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린 것이죠. 빌의 목표는 뚜렷했습니다. 다채로우면서 크리미한 맛의 부드러운 버번을 만드는 것.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매시빌(곡물 배합률 레시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옥수수 70%, 겨울밀16%, 맥아 보리 14%. 이제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패피 반 윙클’이나 ‘웰러’와 함께 밀을 사용하는 켄터키의 흔치 않은 증류소 중 하나입니다. 일반 호밀은 버번의 알싸하고 매운맛을 담당한다면 밀은 부드러움, 빵과 같은 고소함을 표현합니다.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새뮤얼스 가문에 밀은 필수품이었던 것이죠.

메이커스 마크 직원이 수작업으로 병 입구를 왁스로 봉인하고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메이커스 마크는 철저하게 수작업을 추구합니다. 위스키 제조부터 밀봉 단계까지 사람 손이 안 묻은 곳이 없을 정도죠. 메이커스 마크의 상징인 ‘레드 왁스 디핑’도 일일이 사람 손을 거칩니다. 심지어 라벨 부착 작업까지.

◇메이커스 마크의 첫 고숙성 버번

매번 균일한 품질을 고집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던 메이커스 마크가 재밌는 실험을 했습니다. 6~7년 숙성된 제품만 뽑아내던 증류소가 처음으로 약 12년 숙성의 버번을 출시한 것입니다. 버번 증류소의 숙성고를 ‘릭하우스’라고 부릅니다. 보통 6~7층 높이의 릭하우스는 층고가 높고 벽면이 얇아 외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즉, 상층부에 가까울수록 직사광선에 의해 숙성이 빨라지고 층수가 낮을수록 숙성 속도가 느려집니다. 한편, 메이커스 마크는 ‘배럴 로테이션’을 통해 상층부와 하층부의 오크통 위치를 주기적으로 바꿔가며 균일한 맛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통 일반 증류소는 로테이션 없이 상층부와 아래층의 위스키를 섞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숙성 연수가 높은 버번은 만들기가 까다롭습니다. 미국 켄터키 지역의 연교차와 습도 때문입니다. 켄터키의 습한 대륙성 기후는 겨울철 -2도, 여름에는 31도를 오갑니다. 평균 5년 정도 숙성된 버번의 증발량은 30~40%. 연간 3~5%가 ‘천사의 몫’으로 날아가는 셈입니다. 숙성 연수가 길어질수록 담아낼 수 있는 술의 양도 적어지겠죠. 심지어 과숙성 때문에 쓰디쓴 ‘오크물’로 변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버번의 평균 숙성 연수가 4~10년 사이를 오가는 게 우연은 아니지요.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 내 석회 저장고 모습. 사계절 내내 평균 10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 /메이커스마크

2016년, 메이커스 마크는 고숙성에 대한 갈증을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전 세계 최초로 증류소 내에 석회암 저장고를 건설한 것이죠. 저장고는 켄터키 지방의 뜨거운 태양열을 차단하고 사계절 내내 10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합니다. 극단적인 온도 차 없이, 오크통이 잔잔하게 무르익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 셈이죠. 메이커스 마크는 숙성 연수를 늘리기 위해 기존 6년가량 숙성된 원액을 석회암 지하 저장고로 옮겨 5~6년간 추가 숙성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11년과 12년 숙성된 원액을 섞은 ‘셀러 에이지드’.

11년과 12년 숙성된 원액을 섞은 메이커스 마크 셀러 에이지드. /김지호 기자

미국 내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출시와 동시에 시가로 변한 셀러 에이지드는 출시가(150달러)의 2배 이상 웃도는 가격에 거래됐습니다. 첫 고숙성이라는 희소성은 수집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맛도 근래 출시된 메이커스 마크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셔봤습니다.

◇타격감과 숙성감을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

약 12년 숙성된 버번의 알코올 도수는 57.85도. 잔에 코를 대는 순간 주황빛 멀티비타민 주스와 함께 새콤한 체리 향이 코끝을 스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꿀 같은 바닐라의 달콤함도 뚜렷해지는 느낌입니다. 위스키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면 미끈한 질감의 블랙베리를 다크 초콜릿과 짓이긴 듯한 맛이 납니다. 이후 입안 군데군데 계피와 꿀을 바른 듯한 여운으로 이어집니다. 우려했던 오크의 쓴맛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버번의 전투력은 도수에서 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눈길이라도 받고 싶다면 알코올 도수가 최소 60도에 육박해야 할 것입니다. 물로 잔뜩 희석된 어중간한 바닐라와 아세톤 맛에 지배당한 버번처럼 안타까운 게 없습니다. 짱짱한 도수에서 오는 꽉 찬 풍미와 타격감은 버번의 생명줄과 같습니다. 어쩌면 메이커스 마크가 처음으로 그 조건을 어느 정도 만족시킨듯한 모습입니다. 조만간 국내 몰트 바에서도 맛볼 수 있으니 입맛에 맞았다면, 추후 보틀 구매도 고려해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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