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금토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이하 ‘백설공주…’)이 빛을 본 건 2년 만이다. 방송 매체를 찾지 못해 ‘창고 드라마’로 불렸던 작품이 뒤늦게 빛을 본 ‘후광(後光) 드라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지난 8월 16일 첫선을 보였을 때만 해도 시청률은 2.8%(닐슨 전국 기준). 올해 MBC가 선보인 주말 미니시리즈 첫 방송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이었다.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도 단점으로 꼽혔다. 도파민 터지는 로맨틱 코미디와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앞 글자)이 주를 이루는 요즘 드라마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것 아니냐는 평이었다. 게다가 동시간대 경쟁작 SBS ‘굿파트너’(종영)가 시청률 두 자릿수를 넘기며 20%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어렵게 세상에 나왔지만, 그대로 사장(死藏)되거나 외면받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변요한. 그는 고등학생부터 청년까지, 그리고 엄친아에서 살인자까지 주인공 고정우가 10년간 겪은 변화와 그에 따른 심리적인 혼란을 깊은 눈빛과 무게감 있는 연기로 그려내며 극에 무게감과 완성도를 더한다. /MBC

하지만 대중의 선택은 달랐다. 탄탄한 원작에 배우들의 호연이 점차 입소문을 탔다. 21일 11회 시청률은 전국 8.7%에 분당 최고 시청률은 9.9%까지 치솟았다. 첫 방송보다 거의 3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10년 만에 메가폰을 다시 잡은 변영주 영화감독의 드라마 데뷔작이란 점도 화제를 끌었다. 영화 연출 특유의 웅장함과 빈 구석 없는 미장센, 촘촘한 복선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장면 구성은 ‘몰입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드라마 배경인 무천시를 방문한 외부인에서 고정우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가는 하설 역의 배우 김보라.

‘백설공주…’는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인기 소설이 원작이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미스터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전과자가 된 고정우(변요한 분)가 10년 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쫓는다. 의대 입학을 앞둔 촉망받는 모범생이자 마을에서 인기를 독차지했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이다. 출소 후 고향에 돌아와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학대에 가까운 냉대를 퍼붓는다. 그가 가장 가깝다고 여기고 의지했던 사람들은 “결백하다”는 정우의 말을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다. “살고 싶으면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의 어머니까지 불의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믿었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한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린다는 전개는 그동안 국내 드라마에선 거의 보기 어려웠다. 영화 ‘이끼’에서 경험했던 마을 전체의 병적인 집단적 동조가 있었지만, ‘백설공주…’에서처럼 명성, 야망, 질투 등이 ‘합작’해 진실을 외면한 방식은 파격적이다.

주인공의 살인 행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입을 맞춰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갔던 모습을 추적하며 동시에 진범을 밝히는 장면이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황진미 문화 평론가는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자기지상주의’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고, 불행을 모면할 운명의 칼날이 나만 비껴갈 수만 있다면 침묵을 하고 은폐를 하는 모습이 지극히 끔찍하지만 동시에 요즘 시대상을 면밀히 반영한다”면서 “특히 경찰서장 권해효 등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법체계와 상관 없이 권력을 마구잡이로 행사하는 방식과 부성애를 앞세운 폭력적 가부장성을 보이는 장면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회사, 조직,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평했다.

‘구해줘’ 시리즈, ‘돼지의 왕’ 등 장르물 전문 제작사인 히든 시퀀스의 감각도 뛰어났다는 평가. 히든 시퀀스 이재문 대표는 “유럽 원작이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구조와 인식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 덕분에 대중에게 소구력을 갖게 된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은 모습에 분노를 잘하는 한국인들이지만 그 분노가 선택적이지 않다고 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