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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운틴 커피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위스키, 글렌모렌지 시그넷. /김지호 기자

커피를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페셜티로 넘어가는 절차를 밟습니다. 평면적인 맛보다 산미와 복합적인 풍미에서 오는 생동감 넘치는 맛을 찾기 마련이죠. 생두를 마대자루 대신 오크통에 담아 고급화 전략에 성공한 블루마운틴. 세계 3대 커피로 불리는 이 커피는 균형 잡힌 산미와 과일, 초콜릿 풍미가 특징입니다. 이러한 맛들을 위스키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스키계의 윌리 웡카,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알려진 빌 럼스덴 박사가 이를 현실화시켰습니다. 블루마운틴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위스키. 2008년 출시 이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위스키’라는 찬사와 함께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수상을 이어간 스코틀랜드의 글렌모렌지 ‘시그넷’ 이야기입니다.

◇목이 가장 긴 증류기를 갖춘 명품 증류소

게일어로 ‘평온의 계곡(Valley of Tranquility)’을 의미하는 글렌모렌지. 1700년대 ‘모렌지(Morangie)’ 농장에서 불법 증류를 해온 양조장은 1843년, 합법적인 증류를 시작합니다. 당시 자본이 부족했던 증류소는 목이 좁고 긴 진(Gin: 주니퍼베리를 사용한 증류주) 증류기 한 쌍으로 위스키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이후 180여 년에 걸쳐 많은 게 바뀌었지만, 당시 들였던 증류기의 형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목이 가장 긴 글렌모렌지의 증류기 모습. /glenmorangie

증류기의 크기와 모양은 스피릿의 풍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증류기는 보통 구리로 만들어집니다. 촉매제 역할을 하는 구리와 증발하는 알코올이 오래 접촉할수록 무거운 성분들이 빠져나갑니다. 증류기의 목이 길수록 구리와의 접촉시간이 늘어나고 짧을수록 줄어들겠지요. 절댓값은 아니지만, 증류기 폭이 넓고 낮을수록 스피릿의 풍미가 묵직합니다. 반대로 폭이 좁고 높을수록 가볍고 섬세한 스피릿이 만들어진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글렌모렌지의 마스코트는 기린입니다. 증류기의 높이가 무려 5.14m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글렌모렌지 특유의 가볍고 산뜻한 스피릿이 만들어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2004년에는 세계 최대 명품 그룹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가 이 증류소를 인수했습니다. 이제는 거인의 등에 올라탄 셈이죠.

◇최초의 피니싱 기법과 디자이너 캐스크

1987년, 글렌모렌지는 23년 숙성의 1963년 빈티지를 출시합니다. 특이한 점은 22년 동안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한 위스키를 1년가량 올로로소 셰리 오크통으로 옮겨 추가 숙성한 것. 그러고는 최초로 피니싱(Finishing: 추가 숙성)이라는 용어를 라벨에 표기합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오크통을 섞어서 사용하는 게 흔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출시되는 제품 대부분도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 뒤, 각종 셰리나 와인 오크통에서 추가 숙성돼 출시되고 있습니다. 일관된 버번 오크통의 수급이 그 어떤 곳보다 중요한 증류소로 볼 수 있겠죠.

1995년 글렌모렌지에 입사한 빌 럼스덴 박사는 ‘디자이너 캐스크’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말 그대로 맞춤형 오크통을 제작한 것이죠. 방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미국 미주리주 오자크 산맥의 참나무를 잘라 약 2년간 건조해 오크통을 제작합니다. 완성된 오크통은 미국의 버번 증류소인 잭 다니엘스와 헤븐힐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4년간 버번 숙성을 마친 오크통은 다시 스코틀랜드로 회수합니다. 출처가 뚜렷한, 철저하게 계산된 양질의 버번 오크통이 제작된 셈이죠. 회수된 오크통은 2회 이상 숙성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물’ 빠진 오크통으로 위스키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괴짜, 빌 럼스덴 박사

글렌모렌지의 빌 럼스덴 박사. 그는 상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소재에서 영감을 받아 위스키를 만들고 있다. /glenmorangie

위스키 제작의 총책임자인 빌 럼스덴 박사는 자신을 괴짜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듭니다. 무언가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럼스덴 박사. 그는 무중력 상태에서 숙성된 위스키와 지상에서 숙성된 제품과의 맛 차이를 알기 위해 위스키를 우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오크통이 아닌 브라질 체리 통에서 위스키를 숙성한 탓에 스카치위스키 협회에서 경고장을 받기도 합니다. 글렌모렌지 시그넷도 이러한 그의 집요함과 상상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1980년대, 화학을 전공한 빌 럼스덴 박사가 24살 대학 시절 때 일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최고급 와인과 위스키를 마시는 상상을 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상상에 그칩니다. 그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커피와 차. 럼스덴과 친구들은 최고의 커피를 찾기 위해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다양한 생산자와 원두, 로스팅 방법 등을 통한 방법이었죠. 그들이 찾아낸 커피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이러한 결론에 이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숀 코너리, 즉 ‘제임스 본드’가 블루마운틴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007의 취향이 곧 그들의 취향이었던 것입니다.

럼스덴이 커피를 탐구하며 발견한 것은 갓 볶은 커피의 매혹적인 향이었습니다. “위스키 제조에 쓰이는 보리를 볶으면 어떻게 될까?” 그는 킬닝(Kilning: 맥아를 건조하는 과정)이라는 전통 방식 대신 보리를 로스팅기에 넣는 상상을 합니다. 상상은 이내 현실이 됐고 빌 럼스덴 박사의 시그니처 ‘초콜릿 몰트’가 탄생합니다.

◇1년 중 딱 일주일만 생산하는 시그넷

증류소는 일 년에 딱 한 번, 일주일 동안 모든 증류를 멈추고 오직 시그넷만을 위한 시간을 갖습니다. 증류소가 에스프레소 바로 변신하는 순간입니다. 총 12개의 증류기 중 8대가 초콜릿 몰트 증류에 사용됩니다. 초콜릿 몰트를 위한 보리는 220도에서 8~10분가량 천천히 볶으면서 만들어집니다. 초콜릿 몰트는 일반 맥아와는 성격이 달라 밤낮으로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글렌모렌지 시그넷 리저브, 글렌모렌지 시그넷. /김지호 기자

갓 증류된 스피릿은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 뒤 약 7~8개의 원액과 블렌딩 과정을 거칩니다. 숙성 연수도 다양합니다. 12년 이하부터 25년, 30년 숙성된 원액까지. 여러 가지 위스키가 블렌딩 된 원액은 올로로소 셰리 오크통에서 피니싱을 거쳐 시그넷이라는 타이틀을 얻습니다. 시그넷은 숙성 연수 표기 없이 오로지 맛에 기반한 제품입니다. 최근에는 글렌모렌지 ‘시그넷 리저브’가 출시됐습니다. 기존 시그넷의 원액을 페드로 히메네스 오크통에서 추가 숙성한 제품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두 제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 시음을 해봤습니다.

(왼쪽부터) 글렌모렌지 시그넷, 글렌모렌지 시그넷 리저브. 페드로 히메네스에서 추가 숙성을 한 시그넷 리저브의 색이 더 짙다. /김지호 기자

두 제품 모두 적당한 산미와 오렌지 껍질 향이 배어 있는 커피 향이 지배적입니다. 시그넷 리저브의 산미가 조금은 더 강하게 코를 치고 들어왔습니다. 기존 시그넷은 입안에서 미끈한 질감과 밀크 초콜릿의 달콤함에서 여리여리한 초콜릿 푸딩이 연상됩니다. 반면 리저브는 속이 꽉 찬 초코케이크, 중후반부에 묵직하게 치고 오는 복합적인 풍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칫 묽게 느껴질 수 있는 46도의 알코올 도수는 생각보다 힘이 좋았습니다. 입안에서 남는 여운도 꽤 길었습니다. 뭐가 더 좋다고 단정 짓기에는 두 제품의 결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묵직하게 치고 오는 한방과 복합적으로 변하는 풍미를 좋아한다면 리저브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거 같습니다.

2018년 LVMH는 빌 럼스덴 박사를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줬습니다. 온갖 실험을 할 수 있는 라이트하우스(Lighthouse)라는 작은 증류소입니다. 보리 재배부터 증류까지의 모든 과정에 변주를 주고 제어할 수 있는 곳이죠. 상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소재에서 영감을 받아 위스키를 만들고 있는 빌 럼스덴 박사. 앞으로 또 어떤 놀라운 제품을 또 들고나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참, 커피와 초코케이크 조합에 이견이 없다면 글렌모렌지 시그넷은 입문자들도 쉽게 마실 수 있는 모범답안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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