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설립된 인천 미두취인소는 주로 쌀을 선물 거래하는 거래소였다. 시세 변화에 따라 하루 아침에 떼돈을 버는 시장으로 알려져 1920년대부터 투기 광풍이 불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전 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했다. '피 빨아먹는 악마굴'이란 오명을 뒤집어 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땅 문서는 동척(東拓·동양척식회사)으로 들어가고 현금은 인천에 떨어진다.’

1920년대 쌀 투기 거래로 거액의 돈을 날리던(극소수는 일확천금을 하거나) 세태를 빗댄 말이다. 1896년 일본인 미곡상 14명이 인천에 개설한 미두취인소는 조선의 미곡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미두는 쌀과 대두(콩)를 가리키는 말로 미두취인소는 주로 쌀을 거래하던 선물시장이었다.

쌀과 콩을 현물없이 증거금 10%만 내고 청산거래 방식으로 사고 팔았는데,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시장’ 이라고도 불렀다. 1920~1930년대 신문엔 ‘기미 시세’가 요즘 주식표처럼 매일 실렸다.

조선일보 1925년 6월11~13일자에 실린 만화 ‘멍텅구리’는 주인공 최멍텅이 옥매의 환심을 사기위해 거액을 벌겠다며 인천 미두취인소로 향한다.(멍텅구리 만화보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mtguri/mt2_content_wide.jsp?tid=mt120187001&tno=A)

조선일보 연재만화 '멍텅구리' 주인공 최멍텅이 인천에 가서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다 낭패당하는 스토리를 그렸다. 1925년6월11일 멍텅구리 '연애생활' 187~189회

쌀 1000석을 샀는데 요행으로 2000원을 벌었다. 신문기자 월급이 50원일 때니, 3년치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을 순식간에 벌어들인 것이다. 투기에 맛들인 최멍텅은 집 문서까지 잡히고 5000석을 샀다. 그런데 쌀값이 폭락해 보증금을 5000원 더 물어낼 처지가 되자 경성으로 줄행랑친다. 지주와 머슴, 지식인과 학생들까지 멋모르고 뛰어들어 가산을 탕진하던 미두 투기 광풍을 꼬집은 내용이다.

쌀 선물 거래가 이뤄지는 인천 미두취인소(거래소)풍경. /인천광역시

◇미두 투기 배경으로 한 이광수 소설 ‘재생’

춘원 이광수는 1924년 11월 인천 미두시장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3.1운동에 뛰어든 순영과 봉구가 주인공이다. 순영의 배신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봉구가 돈을 벌겠다며 들어간 곳이 인천 미두취인소 중매점이다. 봉구는 “제2의 반복창이 되되, 그보다 더욱 큰 반복창이 되자”며 각오를 다진다. 전문학교 상과 출신인 봉구는 실력을 발휘해 주인의 신뢰를 얻고 큰 돈을 번다.

인천 미두취인소로 몰려가는 조선인들을 스케치한 '조광'1939년 9월호 '미두꾼의 흥망성쇠기' 속 삽화

◇‘세기의 결혼식’ 주인공 반복창

소설 속 반복창(1900~1939)은 당시 미두 투기광풍을 대표한 실제인물이다. 봉구처럼 중매점 사환으로 출발, 미두 시장에 뛰어든지 1년만인 1920년 전후 40만원의 재산을 모았다. 요즘 돈으로 수백억대 재산가가 된 것이다. 떼돈을 번 반복창은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주인공으로 언론을 탔다.

스물한살 '미두왕' 반복창은 1921년5월28일 조선호텔에서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렸다. 반복창(일본명 반지로)은 미두꾼으로 나선지 1년만에 수백억대 재산을 모은 전설적 투기꾼이다.인천에서 고급 열차(2등칸)를 전세내 하객을 실어나르는 장면을 그렸다. ('조광' 1939년9월호)

1921년 5월 28일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결혼식엔 요시마쓰 인천부윤을 비롯, 인천의 관계, 유력인사들이 자리를 채웠다. 반복창은 이들을 초대하기 위해 인천역부터 남대문역까지 전용 열차를 운행했다. 기차역에서 조선호텔까지 수십대의 자동차를 동원, 하객을 실어날랐다. 경성에서 운행하던 자동차가 200대 밖에 안 될 때였다. 혼례 비용만 3만원을 썼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떠들썩한 결혼식이었다.

1920년대 미두 시장의 투기 열기는 여성들에게도 불어닥쳤던 모양이다. 인천 미두시장으로 몰려가는 여성들을 묘사한 월간지 '조광' 1939년 9월호 기사 '미두꾼의 흥망성쇠기' 속 삽화

◇결혼 2년만에 사기범으로 구속돼

하지만 그의 운은 오래가진 않았다. 결혼 직후 잇따라 투자에 실패해 거액을 날렸고 1923년 투자금을 마련하려다 사기 혐의로 구속까지 됐다. 반복창은 ‘중풍으로 반신불수된 헐벗은 사람’이 됐지만 미두 시장을 떠나지 못했다. ' ‘쌀값 오른다, 떨어진다’ 혼자 중얼거리며 시장 주위를 헤매는 미친 사람’으로 떠돌다 인천 미두시장이 문닫기 한달전인 1939년 10월 세상을 떴다. 인천 미두 시장 폐쇄를 예고한 이 기사 부제(副題)는 ‘반지로(반복창) 외에도 무수한 폐인과 자살자 내고 눈물과 웃음의 40년사 종언’(조선일보 1939년5월14일자)이었다.

인천 미두취인소는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개벽 제50호,1924년8월호)로 불릴 만큼 조선인의 고혈을 착취한다는 악명이 높았다.

인천 신포동에 있던 미두취인소 건물. '피 빨아먹는 악마굴'이란 얘기까지 듣던 투기의 온상이다. /인천광역시

◇1924년 ‘혁신 조선일보’의 야심작

미두 투기 광풍을 다룬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13일 탄생한 국내 신문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다.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혁신 조선일보’ 기획이다. 미국 유학파 언론인 김동성(발행인)이 기획하고, 당시 신문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협(편집고문)과 민세 안재홍(주필)이 스토리 구성을 맡았다.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의 양대 제자인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이 만화를 그렸다. 노수현과 이상범은 한국화를 정통으로 배운 예술인들이었다. 노수현은 광복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길렀고, 이상범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 작가로 떠올랐다.

◇최멍텅과 윤바람의 좌충우돌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인 키다리 최멍텅과 그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13일 시작, 1927년 8월20일까지 연재됐고, 1933년2월 26일 재등장, 그해 8월2일까지 연재했다. 본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조선닷컴에 네컷만화 ‘멍텅구리’ 전편(744편)을 공개했다.

<멍텅구리 만화 보러가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toon_comic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