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
1925년 4월15일 오전 11시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 전국 각지의 기자 500명이 모여들었다. 우리말 신문, 잡지에서 일하는 언론인들이 규합한 전(全) 조선기자대회였다. 대회 준비위원회는 상경하는 지방 기자들을 위해 기차 승차권을 50%할인 받도록 교섭하고, 서울 여관 10곳을 숙소로 지정했다. 경성역 주변은 대회에 참석하러 오는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이상재, 안재홍이 각각 의장, 부의장 맡아
참가자들은 직접 투표에 나서 조선일보 이상재 사장과 안재홍 주필을 각각 의장,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언론계를 대표하는 거물들이었다. 기자대회는 이튿날인 16일 ‘언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 법규의 철폐를 기(期)함’ ‘동척(東拓, 동양척식회사)을 위시하야 현하 조선인 생활 근저를 침식하는 각 방면의 죄상을 적발하야 대중의 각성을 촉구함’ 등 5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식민 통치에 직격탄을 날린 대담한 내용이었다. 총독부는 위 결의사항 둘은 ‘보도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대회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 ‘멍텅구리’가 그린 조선기자대회
전조선기자대회 마지막날인 1925년4월17일 조선일보 만화 ‘멍텅구리’는 주인공 최멍텅이 기자대회 간친회(친목회) 초청장을 받는 것으로 기자대회를 다룬다. (멍텅구리 만화보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mtguri/mt2_content_wide.jsp?tid=mt120135001&tno=A) 실제로 기자대회는 마지막날인 17일 시내 상춘원에서 친목회 겸 단합대회를 가졌다.
최멍텅은 참석자 모두에게 만년필을 선물하겠다며 호기롭게 600개를 구입하겠다고 나선다. 자동차 운전수가 그만한 물량은 진고개 일본인 상점밖에 없다고 하자, “조선 사람의 물건을 팔아주어야지”하는 말까지 내뱉는다. 하지만 모임에 늦게 되자 사들인 만년필을 처분할 수없어 만년필 가게를 직접 차린다.
◇준비위원 구속에 항의까지
일제는 3.1운동 직후 ‘문화통치’를 내걸며 우리말 신문과 시사잡지 발행을 허가했다. 하지만 당국 심기를 건드리는 기사는 어김없이 삭제, 압수를 당했다. 조선일보의 경우, 1920년3월5일 창간 다음달인 4월 28일(제4호) 압수당했고, 8월 1주일 정간에 이어 9월엔 무기정간까지 당했다.
총독부 검열이 서슬퍼런 상황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는 억눌린 언론인들의 기개를 떨치고, 언론 자유는 물론 집회, 결사의 자유까지 내걸어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총독부는 기자대회 개최 전부터 시시각각 동태를 감시했다. 경찰은 대회 전날인 14일 준비위원회 상무위원 신철을 구속했다가 기자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총독부 경찰을 규탄하자 16일 석방하기도 했다.
◇전무후무한 전조선기자대회
총독부의 관심이 기자대회에 쏠린 것을 틈타 4월17일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됐다. 다음날 저녁엔 고려공산청년회가 발족했다. 이 때문에 조선기자대회를 공산당 설립을 위한 들러리 행사쯤으로 보기도 한다.
제1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화요회 계통 사회주의자들이 기자대회를 주도했다는 연구도 있다. 공산주의 운동 또는 혁명사 중심으로 1920년대를 보려는 구시대적 시각이다. 전국의 조선인 기자들이 기자대회를 열고 언론 자유와 식민 통치를 비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제하 한국 언론사에서 기억할 만한 빛나는 장면 중의 하나다.
◇'혁신 조선일보’ 야심작 ‘멍텅구리’
전 조선기자대회를 다룬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13일 탄생한 국내 신문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다.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혁신 조선일보’ 기획이다. 미국 유학파 언론인 김동성(발행인)이 기획하고, 당시 신문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협(편집고문)과 민세 안재홍(주필)이 스토리 구성을 맡았다.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의 양대 제자인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이 만화를 그렸다. 노수현과 이상범은 한국화를 정통으로 배운 예술인들이었다.
◇조선닷컴에서 공개한 ‘멍텅구리’ 744편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인 키다리 최멍텅과 그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13일 시작, 1927년 8월20일까지 연재됐고, 1933년2월 26일 재등장, 그해 8월2일까지 연재했다. 본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조선닷컴에 네컷만화 ‘멍텅구리’ 전편(744편)을 공개했다.
<멍텅구리 만화 보러가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toon_comic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