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05번째 레터는 11일 개봉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입니다.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킬리언 머피가 주연과 제작까지 맡아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는데요.
‘오펜하이머’ 이후 머피의 인터뷰에서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소설을 찾아봤습니다. 아주 사소한 풍경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다가, 어느새 가득 채워진 따스함으로 마음이 녹아내리고 마는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까지 물씬 느껴져서 연말에 보기 좋은 작품으로 추천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다만, 소설에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주인공의 내면이 영화에선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아서 조금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빌 펄롱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가시면 영화를 더 편하게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 레터에서는 소설과 비교해가며 소개 해 드리려고 합니다.
198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일랜드의 겨울, 석탄 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매서운 추위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아내와 함께 다섯 명의 딸을 키우는 펄롱은 컴컴한 새벽에 출근해 종일 석탄을 배달하고, 저녁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딸들을 돌보고, 쓰러져서 잠이 들고 다시 일어나 출근하는 하루하루를 반복합니다. 소설에서 펄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해를 돌아보며 뿌듯함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별일 없이 또 한 해가 훌쩍 가버린 것 같아 헛헛한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하루하루 성실히 살았는데 돌이켜 보면 크게 이룬 일도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미래가 두렵기도 하고요. 쉴 틈 없이 다음날, 다음 단계, 다음 해야 할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던 펄롱은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고 삶의 빈 조각을 찾으려는 인물입니다.
영화는 펄롱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살았습니다.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다 지역 수녀원이 감추고 있던 비밀을 목격하게 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머피의 연기는 소설의 문장들이 사라진 자리를 충분히 채웁니다. 머피를 볼 때마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이상하게 고독해 보이는 독보적인 분위기의 배우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배우 본연의 매력이 섬세한 이야기와 잘 어우러집니다. 펄롱이 거울 앞에서 아이로 돌아간 듯이 울먹이고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선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해낸 작품입니다. 펄롱이 수많은 사소한 선의들이 모여서 지금의 자기 자신을 이루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펄롱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받고 싶다고 말하는데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도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인생의 총합이 된다. (Trifles make the sum of life)”
보통은 한 해 가장 기뻤던 일, 가장 큰 성취를 떠올리며 연말을 정산하지만 어떤 사소한 일들이 모여 올 한 해를 이뤘는지, 내년엔 또 어떠한 사소한 일들로 인생을 채울지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한텐 이 영화가 최근의 혼란스러운 뉴스로 놀라고 화나는 마음을 잠시나마 가라앉히고, 한 해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여러분께도 그런 영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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