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트리거’에서 만 33세 사회 초년생 연기에 도전한 배우 정성일. 45세 배우가 ‘MZ 세대’ 신입 사원에 대한 클리셰를 모아둔 듯한 배역을 연기했다./디즈니+

드라마 ‘더 글로리’의 명대사 “멋지다, 연진아”의 그 연진이 남편을 연기한 배우 정성일(45)이 변신했다.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에서 사회 초년생이 됐다. 건설사 대표(‘더 글로리’), 장군(‘전,란’), 임금(‘꽃 피면 달 생각하고’) 같은 기성세대 역할을 했던 그가 나이를 한참 역주행한 것이다. 극 중 인사 서류에 ‘만 33세’로 적혔는데 누가 봐도 얼굴 나이는 그 이상이다. 하지만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막대 사탕을 문 채 문제 많은 ‘신입’을 연기한다. 신개념 사회 초년생이다.

현실성 떨어지는 이런 신입을 시청자가 용인할까. 15일 공개된 드라마를 보니 40대 배우의 사회 초년생은 어색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배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틀에 박힌 방식을 걷어내며 절묘하게 이해와 공감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마음에 아픔이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배우 김혜수는 탐사 보도 프로그램 팀장 역할을 맡아 진지함과 코믹함을 오간다./디즈니+

‘트리거’는 정성일뿐 아니라 배우 김혜수가 주인공을 맡아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탐사 보도 방송 프로그램 ‘트리거’를 만드는 이들의 유쾌하면서도 사명감 넘치는 이야기다. 정성일이 연기한 신입 PD ‘한도’는 다른 팀에서 문제를 일으킨 뒤 ‘트리거’ 팀에 불시착한다. 간판 PD ‘오소룡’(김혜수)과 조연출 ‘강기호’(주종혁), 작가(장혜진), CP(이해영) 등이 따뜻한 합을 이루며 사법기관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악을 들춰낸다.

33세에 첫 직장을 가진 한도는 ‘MZ 세대’에 대한 부정적 클리셰를 집약한 캐릭터다. 직장에서 개인의 영역과 권리를 침해당하는 데 매우 민감하며 사람과 거리를 둔다. 대신 귀여운 동물 영상을 시청하고 남몰래 꽃향기를 맡으며 숨을 쉰다. 인간에겐 기대도 관심도 없지만 동물 학대 사건엔 불을 뿜는 모순을 지녔다. 오소룡이 이런 한도를 포용한다. “가슴에 꽃을 품고 있으면서 잔뜩 가시 돋친 척”을 한다고 그에게 말한다. 한도는 부정하며 “인간들한테 질리도록 치여서 사람 잘 안 믿는다” 말한다. 그는 알고 보니 유년기 상처부터 직장 내 괴롭힘까지 많은 일을 겪었다.

연기파 배우들임에도 몇몇 감정 신은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젊은 배우가 아닌 정성일이 한도를 연기해 이 드라마는 색다른 힘을 얻는다. 차분한 감정 연기가 ‘나이가 젊다고 마음도 젊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들에게도 기성세대 못지않은 감정의 깊이가 있고, 자기 안에 갇히기를 택한 것은 단순한 이기심이나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풀어간다. 살아온 세상이 가시밭길이었기에 가시를 잔뜩 세운 것이다. 40대의 얼굴이기에 다양한 연령대의 시청자가 공감할 여지를 주는 측면도 있다. 정성일은 “평소 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캐릭터”라고 말하기도 했다.

12부작 중 2화까지 공개돼 작품 성패를 가늠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주·조연 배우들의 착착 감기는 자연스러운 연기 호흡, 곳곳에 살아있는 유쾌함, 현실 밀착 메시지들이 찬합에 담긴 정겨운 음식처럼 어우러진다. 김혜수는 최근 제작 발표회에서 “대본을 읽었을 때 밸런스가 좋은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시그널’ ‘슈룹’ 등 드라마에 출연할 때마다 크게 활약한 김혜수는 속 넓은 여장부 캐릭터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또 한번 보여준다.

전문대 출신 계약직 차별 문제, 동물 학대 문제, 사이비 종교 범죄 등 현실적 소재를 다루지만 유쾌함을 놓지 않는다. ‘경이로운 소문’ ‘배드 앤 크레이지’ 등을 연출한 유선동 감독이 만들었다. 유 감독은 “‘트리거’의 재미 포인트는 다채로움”이라며 “사실적인 케이스를 바탕으로 장르를 적절하게 결합하는 부분을 가장 신경 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