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4월19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출발한 자동차 행렬이 종로 등 시내 곳곳을 누볐다. 자동차 54대가 동원된 이 카퍼레이드는 과학지식보급회가 '과학데이'를 맞아 과학의 보급과 선전을 위해 기획한 행사였다. 자동차 행렬 앞에는 소년군악대가 홍난파 작곡의 '과학의 노래'를 연주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5년4월19일 오후1시 광화문 거리에 자동차 54대가 늘어섰다. 조선과학지식보급회가 ‘과학데이’를 맞아 과학 대중화를 내걸고 열린 카퍼레이드였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를 거쳐 시내 곳곳을 일주한 자동차엔 ‘과학데이’ 깃발과 함께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는 구호를 쓴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과학조선을 건설코저 해마다 4월19일을 과학 데이로 정하고 과학에 관하여 강연, 방송, 사진영사 등 모든 과학보급운동을 하여 오던 바 금년에는 일층 더 대규모로 보급운동을 하고자 자동차 기(旗)행렬을 하기로 되어 19일 오후1시에 자동차 수십대에 과학 ‘데이’ 선전문구를 먹 흔적이 똑똑하게 써붙이고 광화문통 네거리를 출발하여 장사진을 늘이고 시내를 일주하여 장안 시민의 머리에 과학에 관한 의식을 새삼스레 일깨웠다.’(가두에 전개된 과학조선의 풍경, 조선일보 1935년4월20일)

이날 동원된 자동차는 과학지식보급회, 발명학회가 각각 10대와 7대를 지원했고, 조선축음기상회(8대)와 박덕유상점, 조선광업사 등 상업계와 신문사에서도 지원했다.

1935년 4월19일 과학데이를 맞아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는 자동차 54대를 동원,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조선축음기상회 등 상점과 신문사까지 자동차를 지원, 대대적 선전활동을 벌였다. 사진은 조선일보 1935년4월20일자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자동차 행렬은 소년군악대를 앞세워 ‘과학의 노래’를 부르며 시내를 일주했다. 김억 작사, 홍난파 작곡의 노래였다.

‘새 못되야 저하늘 날지못노라/그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후렴)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간데마다 진리를 캐고야마네’(1절) 첨단의 문명이기인 자동차 행렬이 시내를 질주하면서 악대 연주에 맞춰 ‘과학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날 저녁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선 과학 강연회가 열렸다. 17일부터 사흘간 라디오 기념방송이 나왔다. 20~25일은 과학관, 중앙시험소, 경성방직 등의 견학과 과학진흥을 위한 전문가 좌담회, 활동사진 상영이 펼쳐졌다.

조선일보 1934년4월18일자에 실린 과학데이 포스터.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는 구호가 적혔다.

◇찰스 다윈 타계일인 4월19일 기점

‘과학데이’행사는 한해전인 1934년 4월19일 처음 열렸다. 경성공업전문학교 1회 졸업생인 김용관이 주도한 ‘발명학회’가 깃발을 들었다. 김용관은 1932년 4월19일 찰스 다윈 50주기를 맞아 전세계에서 과학행사가 열린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1924년 설립된 발명학회는 활동이 부진하다 1933년 이인 변호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하면서 사회적 저변을 넓혔다. 이인은 윤치호 박흥식 등을 고문으로 끌어들였다.

발명학회는 1934년 2월 ‘전 사회적으로 과학 사상을 고취하고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획기적 운동’인 ‘과학주간’ 행사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과학주간 실행회 개최 예정, 조선일보 1934년 2월25일) 준비과정에서 ‘과학주간’은 ‘과학데이’로 명칭을 바꿨다.

‘과학데이 실행위원회’에는 여운형 김성수 방응모 등 한글 민간지 경영주는 물론 현상윤, 유억겸, 김활란, 차미리사 등 교육계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범사회적으로 과학데이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됐다.

1935년 4월19일 낮 경성거리에선 과학데이를 선전하는 자동차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 각종 상점, 언론사가 지원한 자동차 54대가 과학데이 깃발과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거리를 질주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4월20일자에 실린 사진.

◇사설 등 매일같이 과학 기사 쏟아져

4월19일을 전후해 각 신문에 과학데이 기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과학에 뒤쳐진 조선에 선진 과학 지식과 과학적 사고를 보급하자는 뜻에 모두가 공감했기 때문이다. 신문들은 사설까지 할애해 과학데이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조선일보는 ‘가장 발달된 과학 지식을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국민이 현대 국제생활의 승리자가 되고있는 것은 자명의 이(理)이오, 또한 실제의 사실’이라면서 ‘가장 발달된 과학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는 모토는 과학에 뒤진 조선인으로서 반복 역설할 필요가 있다’(과학데이의 의의, 조선일보 1934년4월19일)고 썼다.

동아일보도 과학 데이를 미신타파운동으로 발전시키자고 촉구했다. ‘과학 조선 건설의 기초공사는 오직 미신의 타파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거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라며 ‘이번 과학데이를 기회하여 전 조선 방방곡곡에 미신타파를 목적하는 청년단체와 부인단체가 들어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미신을 타파하자, 동아일보 1934년4월20일)라고 썼다.

1934년 4월19일 평양에서도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다. 조선일보 지국 차량 등 자동차 수십대에 깃발과 구호를 붙이고 거리를 내달렸다. 경성보다 1년 먼저 열린 과학데이 카퍼레이드였다. 조선일보 1934년4월21일자

◇조선과학지식보급회 창립

경성 뿐 아니라 평양을 비롯한 전국에서 과학데이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평양 자연과학동호회 주도로 포스터를 내붙이고 선전 삐라 2만장을 시내에 뿌렸다. 19일 정오엔 자동차 30여대가 과학데이 깃발을 내걸고 관악대까지 동원, 음악을 연주하며 선전 활동에 나섰다. 경성보다 앞선 카퍼레이드였다.

이날 밤 8시 백선행 기념관에선 이훈구 등 연사가 ‘과학의 힘으로 조선을 개척하자’는 강연이 열렸다.(평양에서도 과학데이 선전, 조선일보 1934년 4월19일) ‘과학에 목마른 부민(府民)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정각 전에 대만원을 이뤘었다’(대성황을 이룬 평양의 과학데이, 조선일보 1934년 4월21일)고 할 만큼 성황이었다.

과학데이의 성공에 고무된 발명학회는 그해 7월 조선과학지식보급회를 새로 꾸렸다. ‘우리의 모든 생활방법을 과학적으로 개선하자!’ ‘일체 문화운동 기초를 과학으로 다시 쌓아올리자!’ ‘다같이 손잡고 과학조선 건설하기 위하여 분기하자!’ 등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날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인을 부회장, 방응모 김성수 여운형 등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실무는 김용관이 맡았다.(과학지식보급회 昨夜에 임원선정, 조선일보 1934년 7월7일)

◇총독부 후원단체가 과학운동 주도

1936년까지 기세를 올리던 ‘과학데이’ 행사는 이듬해 카퍼레이드 같은 옥외집회가 금지되면서 기세가 꺾였다. 총독부가 과학대중화운동이 민족운동으로 확산될까봐 경계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 총독부 후원을 받은 제국발명협회 조선지부가 창립됐다. 조선인이 이끈 발명학회의 경쟁상대였다. 조선공업협회, 경성상공회의소 등 일본인 중심의 상공단체가 주도했다. 회장도 일본인이었고, 임원 35명 중 조선인은 4명밖에 없었다.과학 대중화 운동의 주도권은 총독부와 일본인 단체로 넘어갔다.

중일전쟁 발발로 군국주의 분위기가 조성된 1938년엔 김용관이 과학데이 신문 기고와 강연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체포돼 6개월간 수감됐다. ‘과학조선’ 건설은 광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참고자료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7권2호, 1995

황지나, 과학조선 건설을 향하여:1930년대 과학지식보급회의 과학데이를 중심으로, 전북대 석사논문, 2019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편, 과학조선건설의 비전을 제시한 과학활동가, 故 김용관,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공훈록 4,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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