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과학대중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용관(1897~1967). 1924년 발명학회 창립을 주도했고, 1933년 우리나라 최초 과학 대중지인 '과학조선' 창간과 과학지식보급회 설립을 이끌었다. 정부는 2020년 김용관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했다./과학기술유공자 백과

‘금일 시국은 화학공업 만능시대올시다. 화학공업의 기초는 이화학(理化学)교육에 있는 것이올시다. 그럼으로 화학공업을 진흥코자할진댄 이화학자를 양성함이 필요한 것이며 이화학자를 양성하려면 먼저 이화학의 연구기관이 있어야 할 것이올시다.’(발명학회 설립의 필요를 논함 1, 조선일보 1924년7월30일)

식민지 시절인 100년 전 과학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촉구한 인물이 있다. 당시 스물일곱살 김용관이다. 김용관은 산업화에 뒤처​진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와 겨룰 만큼 군사적으로 성장한 이유를 이화학 연구 발전에서 찾았다. 또 산업발전에도 이화학연구가 절대적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서구보다는 늦었지만, 일본은 1917년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를 설립, 과학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도장포에서 일하다 발명가가 된 손창식.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공예학교 정밀기계과에 다니며 발명에 몰두, 여러건의 특허를 따냈다. '미래 조선의 에디슨'으로 소개됐다. 조선일보 1930년 4월8일자

◇발명학회 설립했으나…

김용관은 발명으로 민족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뜻을 품고 발명학회 설립에 착수했다. 관립 공업전습소,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성홍석, 박길룡, 현득영 등을 중심으로 남강 이승훈, 유전 조선제사 전무 등 종교, 기업계 명사들을 발기인으로 끌어들였다. 1924년 10월1일 창립총회를 갖고, ‘공업적 지식의 보급과 발명적 정신의 향상’을 내걸었다. 발명을 통해 공업 진흥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발명학회는 창립 6개월만에 유명무실하게 됐다. 김용관은 사재를 털어 운영자금을 지원했지만, 다른 후원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933년 6월 창간된 대중과학잡지 '과학조선'. 발명학회 기관지였다.

◇경성고공 1회 졸업, 동경 고공 진학

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촉구하고 발명학회를 설립한 김용관(1897~1967)은 누구일까. 김용관의 아버지는 유기도매상이었다. 서울 태생 김용관은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요업과를 1회로 졸업한 선구자였다. 이듬해 동경고등공업학교에 진학했다가 3.1운동 영향으로 1년만에 귀국했다. 기업, 연구소에도 잠깐 일했으나 그의 꿈은 발명을 통한 조선의 공업화였다.

'수상쓰키'를 발명했다고 소개한 평양 출신 송찬용. 1930년대는 발명의 시대였다. 조선일보 1932년11월30일자.

◇도장포에서 일하다 발명가 된 손창식

1932년 6월 박길룡 현득영과 함께 발명학회를 재건했다. 8년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인 발명가들의 활동이 증가했고, 사회의 관심도 높아졌다. 1926~1932년 조선인의 특허 및 실용신안 등록건수가 118건에 달했다. 1926년 한해의 특허 및 실용신안 등록건수는 18건이었는데, 이전 15년간의 실적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조선의 장래 에디슨, 24세의 손창식군’(조선일보 1930년 4월8일) ‘평양 송찬용군, 수상스키 발명’(조선일보 1932년11월30일) ‘전통적 광휘잇는 발명조선의 천재’(조선일보 1933년1월9일)처럼 발명가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연달아 신문에 실리면서 주목을 받았다.

함평 출신의 손창식은 원래 ‘도장포에서 도장파는’일을 하다 ‘열네살 때 자력으로 스팀 엔진과 육혈포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사제 권총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목포경찰서에서 시험발사를 했다가 세치 송판을 뚫는 위력을 발휘했다. 총기는 압수당했다. 손창식은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공예학교 정밀기계과에 다니며 발명에 몰두했다. 척도기, 제도기, 전화자동수화기 등 정부 특허를 받은 발명품도 여럿이었다.

신문은 발명을 권장하는 사설까지 내보냈다. ‘조선인에게 과학교육을 충분히 실시하고 또는 장학기관 같은 것이 많이 있어서 발명자에 대하여 특별한 편리와 경비의 보조를 주게 된다면 적게는 조선 인문과 크게는 세계인문에 공헌할 만한 유용의 발명이 반드시 우후(雨後)의 순(筍)처럼 쏟아져나올 줄로 믿는다.’(조선인과 발명, 조선일보 1933년6월17일) 바야흐로 발명의 시대였다.

◇과학조선 창간

김용관과 발명학회의 최대 공적 중의 하나는 ‘과학조선’ 창간이다. 1933년 6월 창간한 ‘과학조선’은 한국 최초의 대중 과학잡지였다. 92년 전 이 땅에 과학잡지가 탄생한 것도 놀랍지만, 1936년까지 꾸준히 발행했고 1939~1941년에도 속간된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발명학회 이사장을 맡은 건축가 박길룡은 창간사에서 ‘(김용관)씨의 활동과 주선만을 본회 소생상에 기대를 둘 뿐이었더니 의외로 그 성적은 양호하야’라며 발명학회 재건이 오로지 김용관의 노력덕분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적어도 이 기관이 조선사회의 복리행운을 목표삼아 활약코자 하는 이상 만천하형제자매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으로 여기에 본회의 기관지인 이 잡지의 출생을 보게된 것이니 일방으로는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모든 의사를 상호 교환하여 무슨 묘방을 찾고자 하는 바이며 타방으로는 문화향상의 기초지식인 과학과 기(其) 응용을 일반사회에 보급하며 새 발명가에게 과학적 지식을 증진케하며 학생층에게 발명적 정신을 고취하는 것도 본지의 큰 사명일까 한다’(창간에 際하여, 과학조선 창간호)

◇과학데이와 과학지식보급회

김용관의 발명학회는 1934년 4월19일 최초의 ‘과학데이’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뒤이어 ‘과학지식보급회’ 설립으로 저변을 확대하면서 과학대중화 운동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간섭과 새로 설립된 일본인 중심의 과학단체가 경쟁 상대로 떠오르면서 1930년대 후반들어 침체기를 맞는다. 김용관은 1940년 무렵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 활동을 관두고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교사로 옮겼다.

광복 후 조선요업협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원래 전공으로 돌아왔다. 1956년부터 한국발명협회 상무이사와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발명가 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고취한 김용관은 2020년 정부에 의해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됐다. 위대한 생애였다.

◇참고자료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7권2호, 1995

황지나, 과학조선 건설을 향하여:1930년대 과학지식보급회의 과학데이를 중심으로, 전북대 석사논문, 2019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편, 과학조선건설의 비전을 제시한 과학활동가, 故 김용관,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공훈록 4,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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