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당주동 한 양식당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8~9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1월 독회 추천작은 김홍의 소설집 ‘여기서 울지 마세요’(문학동네)와 서유미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문학동네)입니다. 올해 첫 독회를 마친 뒤 정명교 위원이 심사평과 함께 그간 동인문학상의 개황을 담은 글을 보내와 전문을 싣습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제 56회 동인문학상 심사를 시작하며
동인문학상 제56회(2025년) 독회를 시작한다. 이 진술에서 ‘제56회’는, 동인문학상 출범(1956) 이후, 1968~1978년 간의 중단 기간을 제외하고 지속된 회기의 마지막 순번을 가리킨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회귀’란 심사를 진행한 회귀이다. 따라서 수상작이 없을 경우에도 회귀에 포함된다(1963년 제 8회의 경우.) ‘2025년’라는 것은 이 회기의 해당 년도를 가리키는데, 실제로 한 회귀의 검토 대상은 전 해의 8월부터 해당년의 7월 사이에 출간된 작품으로 경계가 그어진다. 2025년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2025년에 시상한다는 것(통상 11월)이다.
제 56회의 첫 독회는 지난 해 12월 26일에 열렸다. 독회 대상 작품은 2024년 8~9월에 출간된 작품들로서, 200자 원고지 600매 이상의 신작 장편소설 혹은 신작 소설집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장기간에 걸쳐 여러 권으로 출간되는 대하소설 급의 작품은 완결된 시점에 검토 대상이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청소년 소설이나 아동 문학은 배제된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첫 독회에 검토된 대상은 40여편에 달한다. 황지윤 기자가 정성스럽게 톺았지만 아마 누락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숫자는 심사위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양이다. 2020년경 일간지가 인터넷 중심의 신문으로 전환한 이후 동인문학상 독회제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현재의 형태로 동인문학상이 도약한 건 2000년 무렵이다. 그때 ‘매월 독회’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처음의 형식은 심사위원들이 각자 주목한 작품들을 거론하며 상호 토론을 거쳐서 후보작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 토론의 결과는 담당 기자가 요약해 기사로 실었다. 처음부터 2010년대까지 그 형식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는데, 2022년도부터 들어서 담당기자가 모어 온 작품들을 심사위원들이 검토하여 각자 우선순위를 정한 후 독회 모임에서 상호 토론 끝에 작품을 선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선발된 후보작에 대해서 심사위원 전원이 독회 평을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사위원 전원이 후보작들 모두에 대해 썼으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각자 선택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2000년 무렵부터 2010년대까지는 썩 낭만적인 시기였다. 그때에는 심사위원들이 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고 말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고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말 그대로 ‘심사 노동자’로 지위를 바꾸었다. 그렇지만 보상 체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도서 구매대금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쾌적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동환경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단이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김수영이 말했듯이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을 글읽기-쓰기의 ‘폭포’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개별 심사위원의 경우, 그런 숭고한 몰입을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한국소설의 향방을 가늠하고 그 가능성의 최대치를 길어내기 위해 참여한다는 본래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건조한 이유에 의해서이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에 힘입어 그런 약속은 이제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만 입증되며, 심사자의 권위 역시 그 행동의 사후적 결과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시대는 어쨌든 와야 했을 ‘때’이고 진화의 항진에 적합한 회로를 따라온 것이다. 예전의 안식을 그리워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러니 힘든 몸을 이끌고 또다시 글 노동의 출발선상에 서게 된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단은 모두가 동등한 지위에 위치해 있으니, 필자가 그들을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약속을 묵묵히 수행하는 동료 심사위원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보내며 다시 한번 노역의 의무에 대한 약속을 되새기고자 한다.
♦여기서 울지 마세요
거짓말의 향연 속에 감추어진 어둠의 가능성
상층부 경영인들의 오류로 ‘프로야구’가 망했고 심지어 금지까지 된다는 이야기가 가능한가? 이런 이야기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란 건 프로 야구팀 어린이 회원이 아니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이야기 성립 불가능의 증거를 대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야말로 한심한 짓이리라. 이 스포츠가 옆 나라에도 태평양 건너에도 매일 시끌벅적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만 상기하면 된다.
이 소설집의 거의 모든 세목들은 멀쩡하고 뻔뻔한 허구들로 빼곡하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다.
벨이 보이지 않아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집에서 나온 사람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코스타 씨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코스타 씨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거구의 사내였다. 우락부락한 팔뚝으로 나를 끌어안더니 양볼에 가볍게 키스를 건넸다.(p.47)
포르투갈에 일을 구하러 갔다가 안내인이 소개한 사람을 찾아간 사건의 묘사이다. ‘코스타 씨’에 대한 묘사, 즉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거구의 사내”, “우락부락한 팔뚝” 등은 ‘포르투갈’이라는 단어의 음성적 이미지가 만들어 낸 인물상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무리 유럽인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본 사람에게 무조건 볼을 부비는 ‘비주’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순전히 작가가 머릿속의 공상을 통해서 창안한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김홍식(式) 거짓말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기간에 걸쳐서 한국인들 안에 누적적으로 형성되었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상투적인 인식의 내용 및 패턴에 근거한다. 이 인식들은 반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에 기초하고 반은 그런 사실들에 대한 중구난방 격의 생각들로 쌓이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수렴된 집단적 상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둘째, 작가는 이런 가상 인식들을 과장적으로 왜곡함으로써 그런 인식들에 모종의 즐거움을 더한다. 이 즐거움은 상투적인 인식을 일그러뜨려서 그 허위성을 드러내어 풍자하고자 하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애초의 허위에 더 허위를 보태어 상상의 영역을 넓히면서 확장(확장은 정복이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걸 목표로 하는, 대체로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유희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소설의 바탕이고 진짜 소설은 그 허풍선 안에 말려서 은밀히 진행된다. 이 ‘인생은 즐겁다La vie est belle!’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듯한 이 이야기들의 뒷무대에서 주요 인물들(주로 화자)이 지독한 무기력과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너머의 이야기다.
중심인물의 공허감의 원인은 바로 파악이 된다. 무엇보다도 저 인식의 유희들이 사실성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삶의 뜻에 무게를 얹지 못하는 자질구레한 ‘아전인수 진실들post-truths’을 소모적으로 즐기는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아전인수 진실들’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거쳐서 정치의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가, 힘센 ‘대안적 사실들Alternative Facts’로 발전하는 게 상례인데, 김홍의 소설들에서 그것들은 바깥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웅크리고 머무른다.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들은 정치권의 독재자들과 맹동자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민초들의 우울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이 가짜 진실들은 거짓말의 향연 내부에 모호한 어둠을 드리우고 그 안에서 상상된 진실들이 맥락을 구성하지 못하고 조리 없이 이리 뒤뚱 저리 퐁당하면서 흐트러진다. 마치 뇌 좌반구의 ‘베르니케 영역’이 고장 난 경우처럼 인접성 장애의 양상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일찍이 체코의 위대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 장애’와 ‘인접성 장애’의 두 언어장애 양상으로부터 ‘은유’와 ‘환유’라는 핵심적 문학적 기법을 밝혀낸 것과 유사하게 김홍의 소설들은 이러한 ‘상상된 진실들의 맥락 붕괴’라는 현상의 묘사를 통해 어떤 문학적 의미단위를 구성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보통 사람들의 진면목을 비추어보는 반성적 거울로 기능 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전에 말한 정치권의 ‘대안적 사실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작은 반딧불들의 반짝임인가? 요새 유행하는 그 어떤 가요처럼?
아마도 이 두 방향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이 이 소설들의 목표의 근저일 수도 있다. 즉 이런 넓은 해석의 가능성은 난무하는 상상적 진실들을 그 현상에서부터 뿌리까지 깊이 있게 성찰하게끔 유도하는 장치로서 이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김홍 소설은 현재의 상태에서 단지 무기력한 양상만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내부에는 심오한 진실 속으로 천착하기 위한 담금질이 진행되고 있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에 미루어 보면 다음 대목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손은 계속 쓰고 있고,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을 지나고 있다. 나는 손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왜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는지. 하지만 손은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것은 쓰지 않을 거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한 번에 되찾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외로워졌다. 내게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을 때만큼이나 허전했다(pp.316~17)
♦밤이 영원할 것처럼
자연이 되고자 하는 충동
서유미의 『밤이 영원한 것처럼』에 수록된 작품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 일반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아이들을 두고 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교 선생님 외의 별도 과외교사들과 거래하고 있으며, 동네의 이웃들과 건조한 관계를 맺고 다양한 방식의 만남을 주고받는다.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회사에 적응하고자 애를 쓰고 있고, 더 나아가 모종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승진을 꾀한다. “집에 있으면 쉬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p.44)는 발언처럼 그들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숄더백을 메고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빠르게 걸었고 다리보다 상체가 앞서 있어 누군가 앞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p.47)는 관찰처럼 그들의 움직임에는 꽤 강한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삶은 그럭저럭 돌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들의 정신상태는, 삶이 쳇바퀴 도는 듯 한결같다는 생각이 자아내는 끈적거리는 권태와 삶의 표피에 머무르고 있다는 삶 자체의 어색함, 항상 실리에 근거해서 결코 깊숙한 교류를 허용하지 않는 인간관계,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키우는 현실과의 위화감으로 서서히 탈진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자신은 떠도는 사람이고 영원히 어떤 곳에 속하지 못하리라는 느낌”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 말을 발설한 사람은 그런 감정이 오래전의 “일시적”인 감정이었다고 변명하지만 곧바로 그 비슷한 감정이 최근에도 자주 엄습한다는 고백을 하고야 만다. 그리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현실의 폭력이 닥치곤 한다. 그때 인물들은 속절없이 주저앉는다.
이런 풍경은 사실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상당히 많은 소설들이 유사한 군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오래전에도 근대인의 원천적인 피로감을 토로한 글들이 많이 있었다. 가령 『말테의 수기』의 서두에서 ‘툴리에 거리rue Toullier’를 걷는 말테에게 일어난 생각을 보라. “그래, 사람들은 여기로 살러 오겠지. 하지만 나는 차라리 여기가 죽으려고 오는 장소인 듯이 생각된다. 거리로 나가보았다. 병원들이 보였다.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지는 걸 보았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나머지 광경을 볼 기회를 잃었다. 임신한 한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높고 뜨거운 긴 담장을 따라 간신히 몸을 움직이면서 간간이 벽을 짚었는데, 마치 그 벽이 거기에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일상의 사건과 풍경들을 메마르면서도 침울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 묘사하는 이런 어투, 마치 생을 슬며시 죽음의 아케론 강으로 안내하는 듯한 어조를 서유미의 소설들도 공유하고 있다. 소설집의 제목은 그런 정서를 적절히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운반하는 글의 움직임은, 당사자인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세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자의 눈길을 담고 자수를 공들여 놓듯 촘촘하고 섬세하게 나아간다.
하지만 서유미만의 소설적 특징으로 주목할 것은 이런 정서와 글쓰기와는 다른 데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과정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서서히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작품에서 나무와 화분이 등장하고 나무 향기, 나무 그늘, 식물의 광합성 등 식물의 존재론적 요소들이 무채색의 천에 수놓아진 무늬처럼 도드라진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어떤 비교 대상에 대한 대안처럼 여겨진다. 식물은 직장에서의 경쟁, 옆 사람의 무관심을 넘어서. 이웃과 동료의 배려, 더운 날의 아이스크림과도 끊임없이 대조의 선을 그린다, 그러니까 자연은 무연히 흘러가는 현실과 겨루는 숨은 대위법을 연출하는 다른 축이다. 그 축이 큰 긴장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의 단조로움에 굴곡과 태깔과 풍미를 부여하며, 서유미식 사건들에 독특한 스타일을 입힌다. 그건 당정인가? 각성제인가? 아니면 밤하늘을 흐르는 은하수 같은 것인가?
구효서·소설가
♦밤이 영원할 것처럼
서유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살짝 마법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마법의 세계라고는 했지만 그 세계라는 것이 “과연 마법의 세계군!” 할 정도는 아니라서 ‘살짝’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끌려 들어왔다는 자각 없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들어와 있는 세계인 듯하여 그 느낌이 ‘기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럴까. 서유미 소설에는 극적인 요소가 없거나 매우 적다. 사건에서든 인물에서든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때깔을 내려는 문장도 아니다 보니 자칫 심심해질 수 있는 이야기들뿐이다. 독자를 포섭할 매혹들을 결여하고 있으니 책을 쥔 손에 힘이 빠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휑하니 비어 있는 소설 같지만 꽉 찬 듯하고, 심상한 문장인 것 같지만 팽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독자는 부지불식간에 그와 같은 살짝 기묘한, 까닭 모를 마법의 세계에 들어앉아 있기 십상이다.
비어 있지만 꽉 찬 듯하고 심상한 문장인데도 팽팽한 까닭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굳이 마법이라고까지 이름하지 않을 텐데, 비어 있음을 알맹이 삼아 꽉 채우고 심상함을 내용 삼아 팽팽하게 감싸는 거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 그렇다면 매혹이라는 것의 결여가 오히려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알맹이로서의 비어 있음과 내용으로서의 심상함 그리고 결여로서의 힘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편의상 ‘밤’이라고 불러보는 건 어떨까. 표제작을 포함하여 수록작 일곱 편 중 세 편의 제목이 ‘밤’을 지시한다. 그렇게 보기로 한다면 서유미의 소설들은 비어 있음 혹은 있지 않음으로서의 ‘밤’과 조우하고 그것을 관통하거나 그것에 머문다.
그러나 소설을 더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서유미의 밤은 조우하거나 관통하거나 머무는 ‘대상’으로서의 장소는 아니다. 어둠에는 경계가 있을 수 없듯이 나와 너는 물론이고 안과 밖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 경진의 밤이 너 101동 여자의 밤이며 (<밤의 벤치>), 밤의 불안이 마치 집 바깥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 켜진 집안과 정확하게 상응한다(<그것으로 충분한 밤>). 이처럼 밤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거나 너에게서 나에게로 이동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부동적 성격을 특정한다. 그러니 새삼스레 발견될 것도 아니다. 구별되는 사물들의 세계로서의 낮이 있듯이 구별되지 않는 세계로서의 밤 또한 태초부터 거기 함께 있어왔으니까. 다만 그동안 우리가 낮으로만 고개를 돌려 분절된 욕망을 과도하게 키우면서 밤을 잊어왔으므로, 누군가는 잊은 만큼의 밤을 다시 ‘키워’ 최소한의 균형을 이루고자 할지도 모르는바 서유미의 작업이 그에 해당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에 관해 언급하자면, 밤 혹은 어둠을 ‘키운다’는 것은 분절된 욕망의 경계를 무화시켜가는 일이므로 ‘잃거나 잊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서유미의 소설에서 사물, 시간, 기억, 공간, 인물 등을 잃거나 잊히는(<토요일 아침의 로건> <밤의 벤치>), 혹은 그것들이(을) 속절없이 지나가거나(<지나가는 사람>), 있지도 않거나 오지도 않을 그것을 하릴없이 기다림으로써(<기다리는 동안>) 오히려 부재와 불가능 혹은 난포착성으로서의 밤을 도저하게 환기한다. 그러므로 서유미의 밤은 탐구 ‘대상’으로서의 장소거나 시간이 아니라 밤을 그 자체로 사유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이를테면 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밤이 말하게 하는 것. 따라서 밤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지식이나 과학의 욕망에 의해서 함부로 규정되고 에워싸이는 내용물이 아니라 밤 그 자체만으로 내용의 전부가 되어 스스로 꽉 차버리는 것. 이러한 역설의 기교가, 비어 있음으로 꽉 채우거나 심상함으로 팽팽해지는 소설의 마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닐지. 독자는 별스럽지도 않은 소설 속 일상을 무심코 따라가다가 밤의 크레바스를 만나 끝도 없이 아찔하게 미끄러진다.*
이승우·소설가
♦여기서 울지 마세요
김홍의 소설 「컬럼비아」에는 토끼들을 하루 종일 뛰어다니게 만드는 기계가 나온다. 이 기계에서 나오는 전파 신호가 아이들을 웃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상술에 밝은 어떤 사람에 의해 이 기계는 인형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세계의 어린이들이 이 인형이 제공하는 웃음에 중독된다.
김홍의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소설 안에 그런 ‘몹쓸’ 기계를 집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머와 재치와 황당한 상상력, 그리고 과장과 역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수사(修辭)가 정신을 빼놓는다. 마치 이야기가 쉬지 않고 쏟아지는 폭포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려고 이러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오지만, 그러나 이야기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황당하거나 기발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을 타고 그 막다른 골목을 훌쩍 벗어나 다른 데로 날아간다. 어쩌면 이 작가는 사실적 수사로 재현하기에는 너무나 비사실적인 우리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르케스가 그랬고, 우화와 알레고리에 기대어 글을 쓴 많은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장과 변신과 우연을 이용한 서사 진행을 통해 그는 우리 시대가, 그의 소설 「z활불러버s」의 시대와 마찬가지로,’기적이 필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우연이라는 개념에 관대”(「컬럼비아」)하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은 버스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아니, 버스가 아니다. 여러 소설에서 이야기가 무한히 확장되어 자주 우주까지 나아가니,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셈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읽다 보면 이 소설들의 화자가 지구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비교적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의 서사 전개 방식은 일종의 나비효과를 모방하는 것과 같아서, 독자는 아주 작은 한 동네의 사소한 에피소드가 변화무쌍하게 발전해가다가 국경을 넘는 것은 예사고, 마침내 우주까지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엄청나게 활발한 이야기의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야기들, 황당함과 과장과 우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서술의 디테일이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개 비사실적인데, 그 비사실적 사건들을 기술하는 화자의 서술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개연성에 대한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 엉뚱한 비사실이 사실의 디테일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마술이 자주 발생한다.
이런 설득력 있는 서술 덕택에 독자인 우리는 그의 이상한 이야기들 속에 깃들어 있는 꽤 심각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야구가 금지된 나라에서 야구공과 함께 우주까지 날아가는 「인생은 그라운드」의 주인공과 함께, 우주 시점으로 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생활과 야구와 슬픈 일들과 서운한 것이 모두 한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녕”하고 인사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우리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빛으로 주변을 밝히는 인물에게 너무 빛나지 말라고,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환해지라고 조언하는 「여기서 울지 마세요」의 주인공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받고 뭉클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저한테서 인간이 빠져나가면, 뱃속에 인간이 없어도, 여전히 제가 인간일 수 있는 건가요?”라고 묻는 「불상의 인간학」의 ‘종회씨’의 질문 앞에서, 문득 숙연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런 교훈이나 메시지가 화려한 수사와 요란한 장식에 덮여 숨겨져 있는 그의 소설의 진면목인지 모른다.
김인숙·소설가
♦밤이 영원할 것처럼
좋은 소설집을 읽는 즐거움은 작가의 흐름을 일관되게 쫓아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들이 각기 소리 내는 것들을 매 편마다 다른 느낌으로 발견할 수도 있겠으나, 내게 보다 큰 즐거움은 그 여러 편의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변주되다가 마침내 깊어지는 작가의 호흡을 함께하는 일이다. 서유미의 이번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이 그렇게 읽힌다. 이야기들은 너무나 ‘가만해서’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듯하다. 표제처럼 밤이 깊어지다가 흘러가다가 슬몃 어딘가에 잠깐 멈추다가 또 지나가는데, 그 자리들이 흔적으로 남는다. 작품 속 화자들에 대한 작가의 응시는 그렇게 지나가는 듯한 시선으로 뭉개지는 대신 오히려 또렷해진다. 힘든 건 분명한데, 힘들다고 호소하는 대신 주변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주변에 머무는 가만한 시선들. 밤이 지나가는 걸 보는 사람들, 그 밤에 묶인 사람들. 그 밤은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고, 직장을 잃은 사람이기도 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신의 지나간 시간을 잃은 사람들이다.
표제작 ‘밤이 영원할 것처럼’에서는 발목을 다친 사람이 나온다. 흔한 사고일 수 있다. 발목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은 직장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 아직 붙어 있기는 하다. 그러므로 어디와 어딘가의 사이에 있는 사람. 어딘가와 어딘가의 사이에 있는, 주장하고 호소하기 어려운 상처. 이 상처를 낫는 법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발을 심장보다 높이 두고서. 심장보다 늘 아래에 있어야 하는 존재인 발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러나 과연 치유될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심장보다 아주 약간만 높은 자리로 자신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 고작 그러하다.
그러나 고작 그러한 이야기들이 좋은 글에서는 묵직해진다. 가만한 것은 더 예민하게 만져진다. 조용한 문장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여기서 울지 마세요
개인적인 취향의 고백일 수 있겠지만, 김홍의 「여기서 울지 마세요」에 수록된 소설들은 꽤나 재미가 있다. 소설에 대한 사회적인 또는 윤리적인 기대를 괄호 속에 넣어 버리고, 소설이란 말장난에 한없이 가까울 수 있으며 골 때리는 상상력의 향연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김홍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소설의 재미를 다시 상기하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김홍의 여러 소설들이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돔구장 30개를 건설하겠다는 기획부동산이 전국민적인 사기로 밝혀진 이후 야구 자체가 불법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이야기, 핸드폰 약정이 끝나자 스스로 갤럭시 핸드폰이 되어버린 이승진 씨에 대한 이야기, 오렌지가 되어버린 옴스테드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남자의 이야기, 원래는 미용실 원장이었는데 사람들이 원장님이라 부르며 의사라고 생각하기에 한동안 의사 노릇을 했다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 등등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향연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과연 김홍의 작품들이 B급 감성으로 포장한 어이없는 이야기들이기만 할까.
표제작인 「여기서 울지 마세요」는 엄청난 발광체가 되어버린 어느 사내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산해. 맛이 좋은 빵을 만드는 작은 빵집에 아르바이트로 채용이 되었다. 최저 시급을 지급받게 되며 밝게 일하면 약간의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것이 계약조건이었다. 문제는 빵집 주인이 말한 ‘밝게 일하면’이었다. 산해는 진짜로 밝게 일했고, 그래서 3000럭스에 육박하는 빛을 발했고, 소비자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빵집으로 몰려들었다. 빵집의 매출은 늘었고, 산해의 보너스도 늘었다. 하지만 주인은 산해를 해고했다. 이후 산해는 야구장의 전광판 쪽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으로 일했고, 그 밝음을 인정받아 미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핵융합 연구에 참여했고, 오키나와 미군 기지에서 진행된 뉴클리어 퓨전 테스트 도중 육체가 소실되었다. 소설의 말미에서 산해는 핵폭발이 되어 지구를 환하게 밝힌다. 참으로 어이없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어이없는 소설이 사회계약론에 근거해서 쓰였다는 점이야말로 더 어이없는 일일 수 있다.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사회는 특정한 실체를 갖지 않는다. 사회는 개별 구성원(개인)들 사이에 마련된 계약과 동의(합의)에 의해 유지되는 인공적인 허상이다. 김홍의 소설은 자신의 내부로 사회계약론을 소환한다. 「여기서 울지 마세요」에서 산해와 빵집 주인이 맺었던 고용계약, 「이승진, 이승진, 그리고 이승진」에서 아버지 이승진이 서명했던 핸드폰 약정, 「바과, 사나나」에서 헬스장 와일드 짐에 등록비를 납부하고 체결했던 장기 계약, 「인생은 그라운드」에서 30개의 돔구장을 건설하겠다는 기획부동산의 계약 불이행(사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집 전반에 걸쳐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사회적 계약이며, 작품의 구성은 계약에 대한 이행과 파기(불이행)이라는 상반된 태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산해처럼 인간에서 발광체로 정체성을 바꾸어서라도 계약을 지킨다면, 다른 한쪽은 빵집 주인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위반하거나 파기하고 의도적으로 불이행한다. 사회계약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동의나 합의도 필요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필요하며, 나는 어떠한 상황이 와도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영웅적인 환상이 필요할 때도 있다. 김홍의 소설에서 인간이 오렌지가 되고, 휴대폰이 되고, 발광체가 되는 환상성이 분출할 수 있는 근거도, 김홍의 소설이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사회계약을 둘러싼 정동(동의, 합의, 신뢰, 환상 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홍의 소설들을 읽으며 황당한 설정에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가슴 한편에서 뭔가 서늘한 서글픔 같은 감정이 스쳐간다고 느꼈던 이유도, 이 즈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홍의 소설들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무엇에 근거해 있는지를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물음은 작년 12월 이후의 한국사회가 붙들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저절로 가지게 되었다.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