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13번째 레터는 22일 개봉한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입니다. 지면과 레터에서 설 화제작 얘길 주로 하다보니 작게 개봉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겐 가슴 깊이 남을 영화를 소개할 시간이 없었네요. 영화 ‘언데드’는 어느새 상영관이 너무 줄어버려서, 다 내려가기 전에 한 분이라도 더 보실 수 있길 바라며 보내봅니다. 제목만 보면 안 끌리지 않나요. 저는 그랬습니다. 또 좀비 영환가. 하품. 또 달려들고 물어뜯고 전염되고 그런? 긁적. 그런데 원작자 이름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오, 필시 뭔가 다른 영화겠군! 북구의 흡혈 소녀와 외로운 소년이 나왔던 ‘렛미인’, 신비한 트롤 미스터리 ‘경계선’을 쓴 스웨덴 소설가죠.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당연하다고 여겼던 인간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각. ‘언데드’도 그랬습니다. 보고 난 후에도 한참, 스스로에게 거듭 묻게 되는 질문이 남는 영화. 내 진짜 마음은 정말 뭘까, 들여다보게 되는 영화. 그리고 들어도 들어도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나옵니다. 어떤 곡인지 아래에 말씀드릴게요.
‘언데드’는 노르웨이 오슬로가 배경인데요, 도입부 5분이 마의 구간입니다. 뭔 얘기야, 왜 저래. 싶어질 수 있습니다. 좀만 참으세요. 제 설명을 듣고 보시면 도움이 되실듯.
영화엔 세 가족이 나오는데요, 먼저, 어린 아들이 얼마 전에 숨진 안나. 식당에서 일하는 안나는 아들이 죽고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안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숨진 아이의 외할아버지가 안나를 돌봐줍니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노인이 그 외할아버지입니다. 두 번째 가족은 코미디언 데이빗과 아내, 딸과 아들입니다. 네 식구는 오손도손 다정하지만, 아내가 교통사고로 수술을 받다 사망합니다. 세번째 가족은 어느 노부인. 함께 살던 파트너(이 분도 노부인)의 장례식을 방금 다녀왔습니다.
세 가족의 공통점이 있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슬로에 원인 모를 정전이 발생하는데, 그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서 집으로 돌아온 거죠. 원작은 수천명이 살아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사회적 재난이 중심인데, 영화에선 딱 이 세 가족을 중심으로 보여줍니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정확하게 집중하는 것도 능력이더군요.
제가 ‘살아돌아온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안나의 어린 아들은 부패가 꽤 진행된지라 배가 부풀어 오르고 썩어가는 냄새에 파리떼가 윙윙 주변을 날아다닙니다. 괴사가 진행된 푸르딩딩한 얼굴이 주는 섬뜩한 죽음의 느낌. 그런데 숨은 또 쌕쌕거리며 확실히 쉽니다. 눈도 가끔 깜박거리고요. 죽은 건지 산 건지. 아들을 보는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코미디언 데이빗은 “아내분 심장이 다시 뛴다”는 병원 통보에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렇긴 한데 산소 수치가 너무 낮아서 생존이 설명이 안 된다”는 부가설명. 노부인은 자다 일어나보니 장례식을 치러줬던 파트너가 돌아와 냉장고를 뒤지고 있습니다. 사람인지 시체인지 몸은 얼음장.
도시를 활보하는 어떤 시체는 멀쩡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사람을 물어서 감염시키는 걸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좀비 영화와는 많이 다르고요. 싸움이 붙으면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하는 정도로만. 경찰청엔 긴급대책본부가 차려지고 돌아온 시체들을 체포하러 다닙니다. 안나의 아버지는 “내 손자를 다시 잃을 순 없다”며 셋이서 숨어 지내자고 합니다.
노부인은 돌아온 파트너에게 정성스럽게 화장을 해주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손을 잡습니다. 그러다 눈을 들여다보며 묻습니다. “거기 어디엔가 아직 있는거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맞기를 바라는 애절한 질문. 과연 그럴까요. 이후의 이야기는 직접 보시고 확인을.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원해선 안 될 걸 원한 대가를 치른다, 고요. 그리고 뒤에 충격적인 ‘토끼 장면’이 있습니다. 자극적인 묘사 없이 소리의 음계만 조율해서 감정을 들어올렸다 내려치는 연출이 기억에 남으실 거에요.
‘언데드’ 중간에 영화를 관통하는 노래가 하나 나옵니다. 아마도 들어보면 많이들 아실, ‘느므끼뜨뽜’로 시작하는 샹송, 자끄 브렐(1929~1978)의 ‘날 떠나지마(Ne me quitte pas)’입니다. 살아돌아온, 그러나 살아있지는 않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절절한 호소. 영화를 보고 나서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가사를 찾아봤는데, 시적인 가사가 영화와 참 잘 어울리더군요.
‘당신께 줄게요, 비가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온 진주알의 비를
땅을 파겠어요, 죽어 쓰러질 때까지, 황금과 빛으로 당신을 덮겠어요
왕국을 만들게요, 사랑이 왕이 되고, 사랑이 법이 되고, 당신이 왕비 되는 왕국을
그러니 날 떠나지 말아요, 날 떠나지 말아요
이제 울지 않을게요, 이제 말하지 않을게요
그냥 듣고만 있을게요, 당신이 노래하고 웃어대는 걸
그러니 날 떠나지 말아요, 날 떠나지 말아요’
떠나지 말라는 음성이 애절할수록 관객은 알게 되죠. 저들은 떠나겠구나. 떠나야겠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아들을 껴안고 도망갔던 안나는 결국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죽었던 아들이나 딸, 아내나 남편 혹은 연인,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시 살아왔다면. 숨은 붙어있으나 그대로 두면 어떤 위협이 될지 알 수 없는 썩어가는 시신을 데리고 도주를 계속할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지. 저는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시 보내고 나면 그 후의 삶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요. 지나치게 감상적인 생각일수도 있겠지요. 아래 링크로 붙여드리는 자끄 브렐의 노래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도 여러분의 답을 찾아보시길.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