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식은 1922년 말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직접 들었다. 도쿄제대 수학과에 다니던 그는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을 이해할 수있는 몇 안되는 전문가였다. 이듬해 7월 그는 부산, 마산, 진주, 수원, 경성, 평양, 정주, 선천 등 전국 순회 강연을 다니며 아인슈타인 붐을 일으켰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3년 7월9일 밤 8시30분, 경남 진주의 유일한 영화관이자 공연장인 진주좌(晋州座)에 수천 인파가 몰렸다.1922년 11월11일 완공된 진주좌는 일본식 2층짜리 목조건물로 무성영화와 공연, 강연장으로 활용됐다. 건립 8개월만인 이날 청중이 몰린 것은 재동경유학생학우회가 나선 ‘문화강연회’때문이었다.도쿄제대 수학과에 재학중인 최윤식과 와세다대 학생 한위건, 김영식 등 강연단 3명은 이날 오후 6시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는 조선에 대학이 생기기 전이었다. 일본까지 유학한 엘리트 대학생들이 강연한다는 소식이 흥미를 끌었던 모양이다. ‘정각 전부터 순식간에 장내 상하 양계(1,2층)에 만원의 대성황을 이룬 중’에 ‘변사(辯士) 제씨가 열렬한 웅변을 토할 때마다 옳소!옳소!하고 박수갈채의 소리는 장내를 진동케하였으며 수천 청중으로 하여금 다대한 감상을 주고 하오 12시경에 성황리에 산회하였다’(학우회 순회강연단,조선일보 1923년7월15일)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자정까지 강연회가 성황리에 열렸을까. 이날 주제는 ‘절대와 상대’(최윤식) ‘문화운동의 경제적고찰’(김영식) ‘개성발전과 사회발달’(한위건)이었다. 청중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재미를 느낄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정까지 ‘수천청중’이 경청했다는 사실은 신문명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과학과 기술' 1981년6월호 표지인물에 실린 최윤식. '최초로 체계적인 수학을 도입'한 인물로 소개됐다.

◇전국돌며 아인슈타인 소개

이날 특히 관심을 끈 연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설명한 최윤식이었다.난해한 수식을 펼쳤을 강연이 주목받은 것은 아인슈타인이 7개월전인 1922년 12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뉴스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일본 순회강연을 하던 중이라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다.최윤식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학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기본지식이 있는데다 아인슈타인 강연을 도쿄에서 ‘직관’한 만큼, 해설자로서 적임자였다.

최윤식은 7월7일 부산을 시작으로 마산(8일) 진주(9일) 밀양(10일)과 공주,청주,수원을 거쳐 16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대교당에서 강연했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절대와 상대’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에 대하여’ 등 제목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을 것이다. 유학생 강연단은 인천 개성 연백 해주 사리원 평양 진남포 정주를 거쳐 마지막으로 최윤식의 고향인 선천(26일)까지 전국을 훑었다. 강연 소식은 잇달아 보도됐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강연을 주목한 기사가 많았다.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 시절인 1940년 1월 최윤식은 새해 학계 전망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공과방면의 대학이 나와야 한다. 500만원의 예산이면 된다'며 민간 공대 설립을 제안했다. 아래 사진이 최윤식이다. 조선일보 1940년1월3일자

◇경성의 상대성이론 특별강연

상대성이론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이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상대성의 원리라는 것은 원래 전문가의 두뇌로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아직 과학이 유치한 조선에서는 특별한 실익이 없으리라 하여 일반 강연은 그만두기로 하고 따로 특별강연회를 열게되었는데, 강연은 전문적 색채는 일체 버리고 통속으로 하여 일반에게 잘 알아듣도록 노력할 터이라 하며...’(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 특별강연은 금일, 동아일보 1923년7월17일)

경성에선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만 따로 떼어내 유료(30전) 특별강연을 했다. 이 신문은 최윤식에 대해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기타 여러 대가의 강연을 6~7번이나 들어 이에 대하여는 매우 조예가 깊다한다’고 소개했다.

◇경성高工,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

평북 선천 출신인 최윤식(1899~1960)은 아인슈타인을 조선에 소개한 주역이자 광복 후 수학 교육의 기틀을 닦은 선구자다.선천 보통학교, 경성고보를 나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1918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이과 4년 과정을 마쳤다.

1922년 도쿄제대 수학과에 진학, 조선인 최초로 도쿄제대 이학부를 졸업했다.1925년 귀국후 휘문고보, 전주고보, 경성공업학교 교사를 거쳐 1931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가 됐고, 1939년 신설 경성광업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이 학교의 조선인 교수는 안동혁(화학공학) 박동길(지질학)과 함께 최윤식까지 셋뿐이었다.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에 자주 출연, 과학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다. ‘태양의 흑점에 대하여’ ‘수학 교육의 필요’ ‘수학의 발달과 문화’같은 물리학, 수학 분야는 물론 ‘어린이 과학’ ‘과학과 여성’ ‘과학가와 발명가’같은 대중적 주제로 강연했다.

◇결혼식장에 갑자기 통곡소리가…

최윤식은 1925년 경성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박진성과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선천의 북예배당에 신랑,신부와 친구들이 꽃으로 장식한 자동차를 타고 나타났고, 소녀가 꽃을 뿌리는 길을 밟으며 식장에 들어섰다. 해프닝도 있었다. 하객들이 운집한 결혼식장에서 한 청년이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기념하는 결혼지환(반지) 교환이 끝난 다음 두 사람의 장래를 축복하는 목사의 기도로 관중들도 머리를 숙여 엄숙하게 조용하였을 즈음에 난데없는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한 모퉁이로부터 울려나와 긴장하던 식장에는 일대 파동을 일으켜 일종의 비장한 기분이 돌게 되고…’(결혼식장에 통곡성, 조선일보 1925년8월30일)

이 청년은 동경전수대학 경제과에 다니는 선천 출신 학생이었다.신부와 한때 사귀었던 이 청년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는 후문까지 소개됐다.100년전 엘리트 선남선녀의 신식결혼식은 이렇듯 화제를 뿌렸다.

◇대한수물학회, 대한수학회 초대회장

광복 후 최윤식의 진가는 발휘됐다.경성광산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서울대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가 됐고,2대 문리대학장을 맡았다.특히 수학 교과서 발간에 주력했다. 중학용 ‘중등수학 1-3′과 고교용 ‘중등수학 4-6′을 집필했고, ‘고등대수학’ ‘고등미분학’ 같은 전문서적을 펴냈다.

조선수물학회(1946) 창립을 주도해 초대회장을 맡은 데 이어 1952년 대한수학회 초대회장을 맡아 1960년까지 이끌었다. 수학계에서 활약한 학자 대부분이 그의 제자일 만큼, 후학 양성에 앞장섰다. 그는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았다.

◇참고자료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 2024

민태기, 조선에 ‘아인슈타인 쇼크’…최윤식은 전국 돌며 상대성이론 알렸다, 조선일보 2024년1월10일

박세희, 최윤식(1899~1960): 최초로 체계적인 수학을 도입, 과학과 기술 14-6, 1981년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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