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못 만나 흥행엔 실패했지만, 오래도록 회자되는 비운의 명작들이 있다.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하 ‘더 폴’)’도 그중 하나였다. 2008년 국내 개봉 당시엔 2만8000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16년 만에 초고화질(4K)로 재개봉한 ‘더 폴’은 3배가 넘는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유례없는 역주행 중이다. 뜻밖의 흥행에 타셈 싱(64) 감독이 내한까지 결정했다. 6일 한국을 찾은 타셈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영화는 1920년대 촬영 중 추락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가 병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며 시작된다. 자살을 결심한 로이는 진통제를 얻기 위해 환상적인 이야기로 소녀를 꾀어낸다.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매일 밤 신비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며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다. 타셈 싱 감독은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 만들 때부터 이 영화는 오래오래 갈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비주얼을 만들고 싶었죠.”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자연 풍경과 의상만으로 만들어낸 화려한 영상미가 역주행 비결로 꼽힌다. 초현실적인 판타지를 CG 없이 찍었다는 사실이 요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수입사도 “극장에서 꼭 봐야 할 영화”로 비주얼을 강조해 홍보했다. 타셈 감독은 “아무리 훌륭한 CG도 10년, 20년 뒤에 보면 시대에 뒤처져 보인다. 하지만 진짜로 만든 것들은 절대 낡지 않는다”고 했다. “이 영화 속 공간은 그 자체로 마법 같은 장소였다. 이곳에서 CG를 쓰면 모자 위에 또 모자를 쓰는 꼴이라 생각했다.”
인도 출신의 타셈은 잘나가는 광고 감독이었다. 19년 동안 광고를 촬영하면서 전 세계 곳곳에 숨겨진 비경을 ‘더 폴’의 촬영 장소로 점찍어 뒀다. 투자자를 찾지 못하던 중,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에게 버림받고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모험을 떠났다. 히말라야의 판공 호수, 아르헨티나의 식물원,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 등 전 세계 24국을 돌아다니며 4년간 촬영했다. 친구였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모든 광고 감독이 언젠가 자기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지만, 그걸 진짜 해낸 멍청이는 너뿐”이라고 했다.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했지만 당시엔 혹평을 받았다. 제작비(3000만달러 추정)의 10분의 1도 회수하지 못하고 극장에서 내려갔다. 긴 세월이 흐르며 열성 팬이 생겼고, 판권이 만료돼 어디서도 영화를 볼 수 없게 되자 재개봉 요구가 빗발쳤다.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에 갔는데 만나는 평론가마다 ‘더 폴’을 볼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거예요. ‘제가 그토록 영화를 알리고 싶었을 땐 어디에 계셨어요?’라고 하니, ‘저는 그때 열 살이었는데요’라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세대가 이 영화를 원하고 있구나 싶었죠.”
타셈 감독은 “수십 년 전의 패션이 다시 유행하는 것처럼, 제 영화도 부활한 것 같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환상적’이라고 해줘도 좋고, ‘거지 같다’고 해줘도 좋다. 내 영화를 보고 ‘그냥저냥 괜찮아’라고 말하는 게 더 두렵다. 오히려 극단을 추구했기 때문에 소수를 만족시켰던 이 영화가 소셜미디어 시대에 재발견된 것 같고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