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전국 곳곳에서 군청과 면 직원들이 칼과 가위를 들고 다니며 거리에서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고 흰 옷에 검정 칠을 뿌렸다. 단발색의를 장려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신문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요사이 강원도 이천군 동면에서는 면직원들이 주동이 되어 농촌진흥운동이라고 색의장려, 단발금주금연 등을 장려하고 있는데, 요즈음은 그 운동의 일단으로 시골 상투쟁이가 면사무소로 찾아오면 단연코 상투를 잘라버리게 한다는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면소를 찾아갔던 ‘상투’양반은 면소문을 나설 때면 반드시 상투를 잃어버리고 까까중이 되어 나온다는데, 이런 소문을 들은 상투양반들은 요즈음 면사무소에 볼 일이 있어 가려할 때에는 미리 상투를 깎고 가는 등 희비극을 연출한다고 한다.’(面所에만 가면 상투黨 공포시대, 조선일보 1933년 9월27일)

◇‘상투黨 공포시대’

면사무소 직원들이 볼일을 보러 간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버린다는 얘기다. 총독부는 1932년 소위 ‘농촌진흥운동’을 펼치면서 사회개선사업을 추진했다. 이 캠페인의 하나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은 1933년 2월8일 단발 강화와 색의(色衣, 색깔있는 옷) 착용을 독려했다.(우원총독 시국담, 동아일보 1933년2월9일) 머리 손질과 흰 옷 빨래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줄인다는 경제적 명분을 강조했다.

총독부는 1920년대 후반부터 ‘모범부락’을 지정, 농촌 진흥사업을 펼쳤다. 이때도 ‘민풍(民風)개선’을 내걸고 단발을 유도했으나 계도와 장려 수준이었다. 총독이 직접 단발색의를 압박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실적 경쟁에 내몰린 공무원들은 강제로 주민들의 상투를 잘라버리거나 흰 옷에 검정칠을 했다.

면 직원들이 사무소에 찾아온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버린다는 뉴스를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9월27일자

◇단발 거부한 70대 노인을 마구 때려

강화군에선 1934년 정월 초하루부터 상투 틀고 흰 옷 입은 면민들은 아예 출입을 못하게 하거나 들어오더라도 업무를 봐주지 않았다. 단발색의를 장려한다는 취지에서였다.(有髮白衣者는 면소출입거절, 조선일보 1934년2월18일)

군청 직원들이 시장에 나가 행인들의 상투를 자르거나 흰 옷입은 사람에게 검정칠을 하는 곳도 있었다. ‘밀양읍 시장 길거리마다 군청원들이 횡행하면서 상투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상투를 강제로 베며 흰 옷입은 사람은 남녀를 물론하고 검정칠을 함부로 하며 조롱반 욕반의 언외 행동을 함부로 함으로 당하는 사람마다 흥분되어 도처에서 시비를 하며 참관하던 일반들도 그 횡폭무쌍한 밀양군청원의 행동에 크게 분개하여 ‘상투를 베거든 머리를 완전히 깎아주고 머리에 쓸 것을 달라 하며 의복에 검정을 칠하거든 염색물을 달라’고 절규함에 응원하여 복잡한 당일의 거리마다 더욱 소란하였다는데….’(밀양군청원의 탈선적 단발색의 장려, 조선일보 1934년2월19일) 밀양 군청직원들의 난폭한 행동에 여론이 들끓었다.

합천 초계면에서는 군청직원이 장날 시장에 나가 단발을 거부하는 70대 노인을 마구 때려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탈선한 단발장려, 반항한다고 70노인 구타, 동아일보 1933년10월29일) 상투 잘릴 것을 두려워한 농민들이 쌀을 팔기위해 시장에 나오지 않아 쌀값이 폭등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단발에 겁나서 시장이 한산, 白米價가 폭등, 동아일보 1933년 9월28일)

관청의 단발 강요에 항의해 단식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조선일보 1934년12월2일자

◇단발에 항의, 단식 자살까지

담양군에선 상투를 강제로 자르는데 항의해 자결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담양군 월산면월평리 이광우(67)씨는 지난 23일부터 동 5일까지 3일간 절식을 단행하여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는데, 그 원인인즉 23일 오전중에 단발과 색의장려원 11명의 일대(一隊)가 전기(前記) 이광우씨를 삭발시키고자 방문하고 갖은 수단으로 삭발을 강권함으로 형세가 위급하여 피치 못하게 됨을 알게 되자 이삼일간 연기하여 주면 내손으로 깎든지 죽어버리든지 할 터이니 강제로 하지는 말아달라고 함에 그의 완고한 성격에 하회가 위험함으로 연기를 응락하였던 바….’(삭발하기 싫어서 단식3일만에 사망, 조선일보 1934년12월2일) 선산을 성묘하고, 친척집을 찾아가 작별인사까지 한 뒤 돌아와 단식자살을 했다는 얘기였다.

◇결박, 폭행으로 단발하다니…

총독부의 강제 단발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신문들은 인권 유린을 거론하는 사설까지 쓰면서 비판했다. ‘단발을 함에 가택을 침입하며 결박, 구타의 폭행을 하는 것 등은 도리어 반감을 사지 않을 수없다. 장려와 선전의 방법은 얼마든지 인격을 존중하고 자유를 인정하면서 행할 수있다. 이것을 무시하는 데에 민원이 생기나니 당국은 감독에 일층 주도한 바 있어야 할 것이다.’’色衣 장려의 폐해, 인권유린의 擧는 불가’(조선일보 1934년10월20일)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한 상투

상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한민족의 관습이다. 1895년 12월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선포됐을 때, 사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은 자를 수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고종이 앞장서 상투를 잘랐으나 단발령 배후에 일본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1895년 단발령으로 상투 튼 사람이 전부 사라졌을까. 도시의 신식 물 먹은 학생이나 지식인, 전문직 종사자는 하이칼라 머리로 갈아탔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한 농어민이나 산촌민 등 민중들은 여전히 흰 옷에 상투 차림이 많았던 듯하다. 1920~1930년대 ‘단발’이 끊임없이 이슈가 되는 걸 보면 그렇다.

◇단발 96~97%, 노인만 상투 고집

총독이 직접 나선 탓인지 1933년 말 단발은 수치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1933년12월말 기준, 충남 천안군은 전체 남자 4만3395명 중 단발자가 4만1681명이었다. 상투를 고집한 1714명은 대부분 노인이라고 소개했다.(4만여남자는 거의 단발자, 동아일보 1933년 12월29일) 합천군은 1933년 10월부터 단발을 철저히 시행한 결과, 전체 남자 5만8829명 중 97%가 단발했다.(9할7푼이 단발, 동아일보 1933년 12월21일) 함양군은 남자 3만9067명 중 1544명만 남기고 전체 96%가 단발에 참여했다. 유색옷을 입은 비율은 80%였다. (단발은 9.6割, 동아일보 1933년 12월30일)

각 지역에서 상투자르기 경쟁에 나서면서 단발률이 96~97%에 달했다. 상투를 튼 사람은 거의 노인뿐이었다는 얘기다. 총독부의 난폭한 단발 강행은 1920년대 문명개화를 내걸고 ‘단발색의’ 캠페인을 펼친 신간회와 조선일보, 기독교, 천도교 등 사회 단체를 당혹케했을 것이다. 정성껏 차린 밥상에 느닷없이 숟가락 들고 나타나 분탕질하는 망나니를 만난 기분일 듯 싶다.

◇참고자료

서동일, 상투는 언제 사라졌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6집, 2023 가을호

설주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연구, 전주대 사학과 박사논문, 2019

김은주, 농촌진흥운동기 조선총독부의 생활개선사업과 ‘국민’동원,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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