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키7’을 몇 장만 읽어도 봉준호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생체 정보와 기억을 입력해두면 똑같은 인간을 몇 번이고 다시 출력할 수 있는 섬뜩한 과학 기술. 그래서 기계보다 인간을 교체하는 편이 값싸고 효율적이 된 시대. 죽고 또 죽으면서도 냉소적인 유머를 흘리는 주인공까지 그 자체로 ‘봉준호’스럽다.
봉 감독이 에드워드 에슈턴의 소설 ‘미키7’을 각색한 SF 영화 ‘미키 17’이 17일 한국 언론에 공개됐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기생충’ 이후 6년 만의 신작이다. 우주 식민지 개척이 시작된 2050년대가 배경.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주인공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는 불멸이라는 이유로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에 자원한다. 외계의 얼음 행성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7번째 미키가 죽은 줄 알고 18번째 미키가 출력되는 바람에 미키17과 미키18이 공존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일회용 인간 미키는 방사능에 노출되고, 독가스를 마시고, 백신 개발을 위해 주사기에 찔리고, 소각로에 던져지고, 또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미키가 프린터에서 덜컹덜컹 뽑혀 나오는 모습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거듭하는 중생처럼 가엾다. 구부정한 어깨, 가늘고 여린 목소리, 힘없는 미소로 고단한 노동자를 연기한 패틴슨의 공도 크다. 봉 감독은 원작보다 열 번 더 미키를 죽여 ‘미키17’로 만든 이유에 대해 “죽는 게 직업인데 일곱 번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 다양한 죽음을 통해 죽는 게 일상이 된 노동자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익스펜더블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위험을 외주화하고, 사고가 나면 소모품처럼 인간을 교체하는 현실에 대한 은유다. 원작이 ‘인간은 복제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파고들었다면, 영화는 돈 때문에 극한의 처지에 내몰린 노동자를 통해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데 무게가 실렸다.
미키17과 미키18의 격차도 커졌다. 소심하고 어수룩한 미키17과 달리 미키18은 반항적이고 과격하다. 사실상 1인 2역을 소화한 로버트 패틴슨은 예측할 수 없는 창의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돌연변이 같은 미키18은 이미 인간은 복제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얼음 행성 개척에 앞장서는 사령관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은 신제국주의를 꿈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판박이다. 헝클어진 머리, 희고 큰 이를 번득이며 화려한 쇼맨십으로 광신도 같은 지지자를 이끌고 다닌다. 봉 감독은 “우리가 겪은 나쁜 정치인들의 모습을 재밌게 섞어봤다”고 설명했지만, 누가 봐도 트럼프 대통령이 떠오를 것이다. 정치인을 풍자하는 코미디 프로처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악당은 영화의 힘을 떨어뜨린다.
얼음 행성에 사는 토착 생물 ‘크리퍼’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조연이다. ‘괴물’의 기괴함과 ‘옥자’의 귀여움을 합쳐 놓은 듯한 이 생명체는 봉 감독의 재치를 보여준다. 아르마딜로 같기도, 털북숭이 구더기 같기도 한 괴생명체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정이 간다. 크리퍼가 위기에 처하자 시사회장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을 정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생명체가 새끼를 구하기 위해 떼로 몰려오는 장면이 압권. 우주에서 펼쳐지는 ‘괴물’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독창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SF지만, ‘기생충’ 이후 한껏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하긴 어려울 듯하다. 봉 감독의 특기인 팽팽한 긴장감이 부족하고 대체로 원작의 줄거리를 따라 평이하게 흘러간다. 영화적 장치를 더해 볼거리는 풍성해졌지만, 노골적인 풍자로 원작의 깊이와 재미는 반감됐다.
15일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된 이후, 외신과 평단의 반응도 엇갈렸다. 로튼토마토에서 평론가가 평가한 신선도 지수는 86%로 ‘기생충’(99%), ‘마더’(96%), ‘설국열차’(94%)에 비하면 낮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는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극찬했지만 BBC는 “혼란스러운 SF.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서는 심각하게 실망스럽다”며 5점 만점에 2점을 줬다. 15세 관람가. 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