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10~11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2월 독회 추천작은 김기창 장편소설 ‘마산’(민음사)와 김지연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문학동네)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마산
상징의 몰락이 상징이 된 도시의 이야기
어떤 특정한 장소가 소설적 주제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있다. 가령 한국 소설에선 안수길의 『북간도』가 그런 작품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해당할 것이다. 역시 소설은 아니지만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쉬로François Sureau는 ‘센 강’을 자기 인생의 본질로 삼아 그 긴 줄기 속에서 문학과 사상을 길어 올린 작품, 『시절의 황금L’or du temps』(Gallimard, 2020)을 상재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흔한 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 장소가 일종의 상징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상징성을 부여하는 건 그 장소가 내장한 역사적 경험들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글쓰기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공력이 그 장소에 황금 갑주를 입힐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른바 ‘상징적인 것’은 그것이 구성원들의 총의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던 시대에나 빛을 발할 수 있다. 가령 무명 가수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서 훗날 ‘가왕’으로 등극할 ‘극장인생’의 교두보를 구축했던 것은 ‘부산’에 내장된 상징성이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보통의 한국인들 일반에 의해서도 한마음으로 소중히 보듬어지고 뜨겁게 갈망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상징이 환상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제의 숨은 원리로 작동하는 시대에 접어든 게 오늘날의 시대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회적 사실의 폭로는 상징 원리의 해부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게 소설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거론되는 상당수의 사회 묘사 소설들이 제 기능을 못하는 건, 상징원리라는 심층구조에 대한 천착이 없이 자질구레한 사실의 나열로서 폭로가 증명되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뿐만 아니라, 이른바 ‘팩트’에 집착하는 역사 해석에도 진지하게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소설가 김기창은 작가의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마산’이 그런 상징성을 화려하게 내장하였다가 내외에서 닥치고 양성된 오류로 인해 차츰 하락하다가 마침내 처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단순히 그릴 뿐만 아니라, 그 전 과정을 복기하면서 최종적으로 불의 장례식을 치러 줌으로써, 억울한 사연의 굴곡이 징한 도시의 죽음과 죽기보다 “사는 게 더 무서”(p.260)웠던 주민들의 ‘혼’을 애도하고 역사 저편의 묘역에 안장시키는 의례를 진행하였다. 세 세대(혹은 3대)에 걸쳐 일어난 전 과정을 세세히 기록하면 아마도 대하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긴 글쓰기 대신, 사건들을 발췌적으로 표출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삽화 구성을 통해서 400쪽가량의 장편으로 만들었다.
‘마산’이 역사적 상징의 저장고였다는 것은 그 도시 및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특성이다. 마산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의 시발점으로서 4.19의 뇌관이 되었던 곳이고, 70년대에 ‘마산수출자유무역단지’의 개장을 통해 정규직 노동자 계급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장소이자, 그 집약적 결과로서 1970년대 말, ‘부마항쟁’을 터뜨린 곳이었다. 요컨대 마산은 주체성이 뚜렷한 사람들의 저항과 자유의 온상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그곳이 이제는 군항도시 ‘진해’와 함께 경상남도 도청소재지 ‘창원’에 통합되었다.
이 도시의 사회적 지위가 약화되어간 시간은 작가에 의하면 저항의 도시가 은밀하고도 집요한 범죄로 전락하게 된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타이밍→마리화나라는 표식이 가리키는 파멸을 가져오는 우연한 소도구들을 잘 살아보고자 실행하는 ‘의도’의 연료로 공급함으로써, 의도를 파탄시키고 그 실행자들을, “잘못 호명된 주체misinterpellated subject”(James R. Martel, The Misinterpellated Subject,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7)로 전락시키는 사건들이 핵심 장면들을 구성한다. 요컨대,
라는 진술 속에 표명된 ‘싸움’의 의자와 실행이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처럼 낭만적이면서도 간절한 바람들로 넘실거렸다”가 “오늘의 행복과 찰나의 쾌락”(p.295)으로 변환되면서,
와 같은 모습으로 비틀거리다가, “아름다운 걸 포기하는 습관 […], 바다를 포기하고, 산을 포기하고, 자유를 포기하고, 인권을 포기”(p.295)하는 존재로 찌그러들고, 그들 안에 너울거리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가느다란 희망”(p.268)이 덧없고 희미한 꼬리를 남기면서 소실되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의 묘사는 감각적인 공명을 일으켜 독자로 하여금 한 뜻깊은 상징의 몰락을 애잔하게 바라보게끔 한다.
이 작품에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구성이다. 전체적인 얼개는 매우 단단하다. 그럼에도 그 단단함이 거꾸로 인테리어의 다양한 오브제들의 자율성을 억제하고 획일화하고 있다. 앞에서 사건들이 발췌적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했는데, 이런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각 에피소드들의 암시성과 에피스도들 간에 상호 반향을 가능케 하는 형태적 구축이다. 그런데 ‘상징의 몰락’이라는 대주제가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해서 세 세대(혹은 3대)에 걸쳐져 있는 사건들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작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으로 독서를 거북하게 만든다. 또한 세 세대에 걸친 인물들의 얽힌 관계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해가 되는데, 이런 ‘감춤’이 어떤 미학적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기능은 독자에 대한 ‘심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독자에 대한 효과적인 ‘도발’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일찍 책을 덮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이 될지는 좀 더 숙고해봐야 할 것 같다. 혹시 이는 전체 구성의 단순성을 은폐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의 여파는 아닐까?
그럼에도 이 소설은 매력적인 작품이다. 특히, 비유가 그렇다.
“시리도록 냉혹한 현실 앞에서 얼어붙지 않는 시냇물 같은 의지와 사랑도 있는 것일까?”(p.57), “이 거리에 들어서면 영화 세트장처럼 오래된 나무 냄새 같은 것이 났다.”(p.72)처럼 사회적 물상을 자연에 비유하는 독특한 처리(통상 자연에 대한 비유는 특별한 사실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김기창의 비유에서는 두 비유 영역의 어긋남으로 인하여 일종의 이질감을 자극하는 효과가 강한 것처럼 보인다.)가 눈에 띄는가 하면, “어머니의 적당히와 은재의 적당히는 조수간만차 같은 게 있었다.”(p.86)나 “현실은 재단할 수 없는 옷 같았다”(p.89), “도둑질이 해무처럼 짙고 넓게 퍼져 있었다.”(p.249)처럼 비교범주의 폭이 매우 넓어서, 요즘 유행하는 ‘생성형 AI’식으로 말하면, 관계성이 엷어서 벡터의 내적 값이 음수인 상태가, 일종의 신선함을 제공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비유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케 하는 힘이 있다. 가령, “검은 피부에 서글서글한 눈 그리고 대구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남자는 어 실장, 우영이었다”(p.213)같은 묘사는 인물의 형상을 단박에 떠올릴 수 있게 한다.
1960년대 김승옥의 “감수성의 혁명” 이래, 1990년대의 윤대녕의 소설들을 비롯, 참신한 비유를 도입하여 문학적 향유의 차원을 넓힌 작가들이 있었다. 김기창도 이 반열에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소망을 품는 것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동미 아버지’의 편지에 기인하는 듯하다. 가상의 상황을 고안해내는 데 골몰하는 근래의 소설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절실한 감정의 표백이다.
♦조금 망한 사랑
지나치게 밝은 슬픔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문학동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건만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배경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배경이 사건에 통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행위 차원은 맥락과 사건으로 구성된다. 사건은 형상의 출현과 전개를 맥락은 그런 형상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려준다. 맥락을 통해서 독자는 사건을 이해하고 그 사건의 추이에 대한 다양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맥락의 파악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사전인지’ 사항이 된다.
김지연의 소설에는 그런 맥락이 없는 것이다. 한데 사건만이 있다고 해서 스릴 넘치는 사건들이 하냥 펼쳐지는 건 아니다. 황석영식 행동주의 묘사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이곳의 인물들은 맥락을 반추할 여유가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홍수나 해일과 같은 현실의 맥락 속에 위태롭게 휩쓸려 다니는 돛단배와 다름없는 신세라는 걸 가리킨다.
같은 진술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맥락에 개의치 않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맥락에 삼켜졌기 때문에 맥락의 잔여물로서 겨우 존재하는 것이다.
와 같은 진술은 그런 사정을 명료하게 요약한다.
한데 소설적 묘사의 흥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맥락에 삼켜진 인물의 심리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그대로 복제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정현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치를 서일에게 주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채마저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이 인용문의 앞 문단(지문)에선 곤경에 처한 인물이 자신의 심리를 노출하고, 뒤의 발언에서는 대화 상대자가 인물의 심리를 꼬집는다. 이 둘 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지문’과 ‘대화’가 즉각적으로 이어짐으로써 둘이 하나로 통합되고 내용의 질적 차이에 의해 앞 문단의 지문은 뒷 문단의 대화에 종속되게 된다. 그럼으로써 지문은 심리 묘사가 아니라 그대로 심리의 표백이 된다.
묘사의 객관적 거리가 사라지고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요동이 된다는 것이다. 모두에서 “배경이 없고 사건만이 있다”라고 판단한 소이이다. 이럼으로써 김지연 소설의 추이는 심리적 지하 생활자의 긴박한 마음의 표현이 되고, 독자는 생각에 앞서서 감각적 음미에 초대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인물들의 긴박한 마음의 표백은 행동 불능 상태의 표출이다. 그 마음이 꿈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일어날 수 없는 일들”(p. 247)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은 계속 ‘공허’만을 가습기 김처럼 내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 없는 기운이 현실의 욕망으로 가득 찬 대기를 희석시키고 맑은 풍경을 조성한다. 그 풍경 속에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에 표현된 대로 너무 밝은 슬픔이다. 그 슬픔의 광원이 현실의 더러움과 슬픈 인물들을 동시에 비춘다. 물론 맥락이 제거된 이 소설들에는 그 현실과 인물들 사이에 결정적인 연결은 없다. 인물들의 서글픈 형상은 원인도 결과도 없이, 오로지 현재 상태만 부조된다. 덕분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시간에서 배제된 이 존재가 자주 찾는 건 무의미한 유희 혹은 쓸데없는 몸동작들, 자연적 사실에 대한 관찰들뿐이다. 이것이 현실과의 투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의 탐구는 독자의 몫이다.
구효서·소설가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의 단편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에는 <조금 망한 사랑>이라는 단편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조금 망한 사랑》에는 ‘표제작’이라는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연 아홉 편의 단편을 ‘대표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대표라니.
아닌 게 아니라 김지연의 각각의 소설들도 내용상으로도 대표적이라 할 만한 무언가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표적이겠다 싶어지면 어느새 그 곁에다 대표적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슬쩍 놓아둠으로써 대표성을 희석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작가들의 이러한 서사 진행방식을 두고 그동안 필자는 ‘능청’이라고 말해왔으나 오늘은 왠지 ‘해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포기>를 읽다가 김지연의 해찰부리기 수법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호두라고 불리는 화자의 사촌 도영호가 의릉에 들어가 벌이는 행각은 해찰 수법의 백미라 평해도 좋을 만큼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미 3년 전에 읽은 작품임에도 선하게 남아 있다. 호두를 갖고 다녀 호두라고 불리는 호두가 그날 저녁 의릉에서 ‘미친개처럼(28쪽)’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다가 호두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고 집에 와서 한다는 말이 “그거 거기서 자라면 어떡하지? (32쪽)”다. 그게 생 호두라면서.
짧게 요약을 해서 그렇지 소설로 그 해찰의 전후 장면을 접하면 코미디 같기도 하고 ‘나’도 호두도 영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소설의 전체 의미맥락과 관련 없어 보여 해찰 수법이라고 말하는 것일 텐데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걸 보니 전혀 관련 없지는 않겠다는 짐작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겠다. 전체 서사에서 이 장면만을 따로 떼 내 보면 재미있지도 인상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김지연은 대표성을 희석하기 위해 대표적이지 않은 것 같은 해찰의 요소를 공들여 병치한다. 따라서 대표성은 흔들리고 방해받고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김지연 소설의 생산을 추동하는 동기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들고 방해하여 대표성을 무력화하거나 그것에 의문을 갖게 하려는. 이를테면 ‘아버지의 이름’이라거나 ‘팔루스(phallus)’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의 대표성에 대해.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결혼과 가족의 대표성이라든가 우리의 세계 인지과정과 삶 모두에 낱낱이 간섭하여 지배하는 위력으로서의 돈의 대표성 같은 것들.
흔들고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그것에다 대포를 쏘는 것만큼의 충격을 주기도 한다. 남편과 아이까지 ‘빼앗아간’ 여자에게 남편의 사망보험금마저 남김없이 건네주는 것도 모자라 여자가 포함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어 다니는 ‘안지’라는 인물의 폭발성이라니(<좋아하는 마음 없이>). 이 이야기에 누군가는 깜짝 놀라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가슴 뻥 뚫리는 후련함을 맛보지 않을까. 그러나 김지연의 소설은 충격 일변도가 아니다. 일변도라는 것은 대표성의 강력한 요소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단일작품으로서 대비되는 <가능한 밝은 어둠>이라든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와 같은 담백한 단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전혀 어색하지 않게) 나란히 놓이는 것이 아닐까. 대표성을 흔들고 방해하는 것이 곧바로 소수성이라든가 소외층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이 김지연의 작품이 ‘대표적’인 퀴어, 페미, 리얼리즘과도 구별되게 하는 요소이며 그것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노정하게 한다. <먼바다 쪽으로>에서도 명주조개와 떡조개를 구별할 수 없고, 현태의 망상도 돈 때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며, 그 모든 사물과 현상을 ‘하나의 단어(200쪽)’로 일컫기에 요원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의 단어로 일컫는 순간 대표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단편에 돈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자본이라는 대타자 혹은 대표성이 우리 존재와 삶에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포착하려는 것일 뿐 계급성과 같은 하나의 단어로 현상들을 다시금 귀결지으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서로 좋아 죽는 것(139쪽)’을 하나의 단어로 일컫자면 ‘사랑’일 텐데(<좋아하는 마음 없이>) 이러한 사랑의 대표성은 흥미롭게도 돈에 의해 여지없이 무색해지기도 한다(<포기>, <반려빚>,<긴 끝>). 이들 작품 속에서는 돈이 없으면 안부도 물을 수 없고 돈이 없으면 헤어질 수도 없다. 사랑 따위는 돈의 하부구조인 것만 같으니 대표성으로서의 사랑은 또 다른 대표성인 돈에 의해 무너지거나 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김지연의 문학은, 사랑을 비롯한 모든 하나의 단어들은 망해야 하며, 그 무너진 폐허 위에서 망연하고 헷갈리며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의 윤리를 앓아야 한다고, 해찰부리는 서술 방식을 통해 모호하게 말하는 듯하다.*
이승우·소설가
♦마산
『마산』은 손으로 쓴 소설이다. 하기야 손으로 쓰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책을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적 감각으로 읽힌다는 이 감상은 중의적이다. 소설의 전통 문법이 요구하는 구성, 이야기, 주제를 고루 갖추고 있어 익숙하고, 익숙해서 신뢰가 간다. 기교적 실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통 소설의 문법 안에서의 실험이다. 가령 1인칭 화자를 3인칭 인물처럼 다룬다든지 각기 다른 인물들의 독자적 사연을 병렬식으로 전개하는 것 같은. 그런가 하면 형상화 과정이나 표현 등에서 어딘가 구식의 느낌도 준다. 지나치게 빠른 매체의 교체를 의식하는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발생하는 이 낯섦이 다른 쪽의 익숙함과 공존하며 특별한 독후감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작가의 수공업적 수고와 진정성 같은 것을 더듬어 찾게 한다. 손으로 쓴 소설이라는 감상은 아마 거기서 생겨나는 걸 테다.
소설에 나오는 설명에 의하면, 마산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별처럼 반짝였다가 IMF 외환 위기 전후로 찾아온 정보화 시대에 스리슬쩍 퇴출당한 후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이름마저 잃은 도시”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에 관여하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은 현재 그 이름을 잃고 창원시의 일부가 되어 있다. 작가는 그 도시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고, 시대와 사회에 제한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의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공간은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기도 한다. 도시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한다. 한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통시적 관점을 취한다. 변곡점이 될만한 세 시기가 택해지고, 그 시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그 인물들의 유기적 관계는 서술자라고 할 수 있는 ‘나’에 의해 포착된다. 각자의 삶은 독자적이지만 그러나 서로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은 낯설지 않다. 어떤 일은 갑자기 일어나지만, 그러나 이유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서로는 서로에게 인과적이다. 작가가 선택한 문제적 세 시기는 정부 주도의 산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던 1974년, IMF 외환 위기로 한국 경제가 휘청이던 1999년,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1년이다. 이 시기는 한국 사회를 말할 때 꼭 참고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연들은 마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닌 셈이다.
마산이라는 도시의 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작가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미지 중에 대표적인 것이 광남호텔이다. 이 호텔은 쇠락했고, 사람이 거의 찾지 않고, 심지어 마약 거래로 이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의 인물들은 이 호텔의 부흥을 꿈꾸고 그 꿈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애쓴다. 희망이 없을 때는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을 받은 소설 속 인물 준구의 대답에서 독자는 작가의 기대와 염원을 읽는다. 준구는 희망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답한다. “뭔가 나아지리라는 희망. 그건 나도 모르게 생기고 또 갖게 되는 것 같아.”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마산으로 돌아온 다른 인물 동미를 통해 작가는 마산을 새로운 도시처럼 보이게 한다. “건물들은 낡았지만 죽어가는 도시가 아닌 살아나는 도시 같았다.”
작가는 마산 앞바다의 무늬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독자는 문득 그 바다의 무늬를 보러 가고 싶어질 것이다. 홍콩빠, 만날고개, 통솔집 거리가 보고 싶어질 것이고, 무엇보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낸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꿈과 좌절의 상징인 ‘돝섬’이, 내가 그런 것처럼, 궁금해질 것이다.
김인숙·소설가
♦마산
김기창의 장편소설 ‘마산’은 제목 그대로 마산에 관한 모든 이야기이다. 1970년대로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산의 역사, 마산의 변천,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도시의 이야기이면서 국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4.19의 촉발로부터 시작하여 부마항쟁을 거치고, 노동자들의 생존을 짓밟아가며 산업화에 이르고, 경제 번영에 이르고, 모든 슬픔과 상처의 대가로 민주화를 이루고, 그러나 그래 봤자 도달한 것은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지나왔는데, 어째서 여전히 오늘인가. 그러므로, ‘마산’은 남쪽 해안가 도시 역사, 풍경,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다시 또 부닥친 지금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시대를 넘나들며 격자 형식으로 이어진다. 시대의 흐름이 만만치 않아 그 넘나듦이 어지러울 만도 한데, 작가의 중심이 단단하다. 흘러가는 것과 흐르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성장의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서로의 호흡을 맞춘다. 이야기가 이야기끼리 만나 깊어진다.
김기창은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공간의 역사에 대해 천착하는 솜씨가 놀랍다. 광장에서부터 뒷골목까지 조밀하게 흔적을 쫓는다. 퇴폐와 타락까지. 무너지는 것들까지. 그것들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에 이르러 파편이 되었나. 공간의 역사가 사람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사람의 역사가 공간이 되기도 하겠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적어도 서울은 그럴 기회가 적당히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마산은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인 1974년의 동미와 대마초를 키우는 1999년의 준구를 거쳐 2021년에 이른 은재와 태웅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산이다. 짓밟힌 희망과 기회, 그러나 그것들이 이루어낸 한 공간의 뼈대에 관해서라면 분명히 그러하다. 그것이 마산일 뿐더러, 마산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다. 좋은 소설은 그렇게 소설 바깥으로 경계를 넓힌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몇몇 작품들은, 대표적으로 「반려빚」과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두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돈이다.
「반려빚」에서 정현은 친구 서일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잠적을 해버려서 그 대신 빚을 반려자 삼아서 갚아 나간다. 서일은 원금에 해당하는 돈을 송금해 왔고, 그 나머지 이자는 정현이 갚아야 했다. 빚을 다 갚은 날 정현은 “마침내 0이 된 기분”을 느낀다. 이자만큼의 금전적 손해를 본 셈인데 왜 마이너스(-)가 아니라 영(0)이 됐다고 느낀 걸까.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남편의 불륜을 저지르자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포기하며 이혼을 했다. 그 후 전남편의 사망 소식과 함께 보험료가 안지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남편의 상간녀는 양육비 명목으로 보험료를 요구했고 안지는 조건 없이 보험료를 넘겨주기로 한다. 보험료를 해결하기 위해 만난 카페에서 상간녀는 지갑을 두고 나갔고, 뒤적거려 본 지갑에서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언젠가 상간녀가 사진을 찾으러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었다. 그뿐이었다. 어떤 의도나 의욕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좋아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쩌다 보니 상황의 무의식에 이끌린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반려빚」이나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경우 사기 또는 금전적 손해에 해당한다. 남 좋은 일 한 것이고 멍청하게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지연의 소설은 이 대목을, 남 좋은 일 ‘하다’도 아니고 사기를 ‘당하다’도 아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다’의 차원에서 서술하고 있다. 책임 소재를 논하자면, 돈 빌려주고 친구 잃고 이자만큼 손해를 본 일이 정현만의 책임일 수 없고, 양육원 양보하고 이혼해 주고 보험료까지 넘긴 안지의 온전한 책임일 수 없다. 정현과 안지가 처한 상황(사기, 금전적 손해, 인간관계의 붕괴)를 두고 망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면, 정현과 안지가 망한 것은 맞지만 온전히 정현과 안지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다. 하다도 아니고 당하다(시키다)도 아닌 되다의 영역이 삶 속에 언제라도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 같은 빚이나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은 삶 속에 잠재해 있는 되다의 영역을 대변하는 은유이다. 상품은 화폐와 교환되어야 하고 빌린 돈은 원금과 이자로 상환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김지연의 인물들은 교환에 대한 매우 독특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지점을 멋지게 요약하고 있는 말이 책 제목인 ‘조금 망한 사랑’이다.(이 제목을 붙인 편집자는 김지연의 소설에 대한 최고의 독자이자 비평가이다.) 조금 망했기에,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기에, 삶의 가능성은 회복되고 삶은 다시 지속된다.
김지연의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 김연수가 느꼈던 ‘이상한 안도감’도 이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지연의 소설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자본주의)의 논리들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그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김지연의 소설에 대한 해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단 점에서 이 글은 망한 글이다. 다만 조금 망한 글이어서, 다시 김지연의 소설을 읽을 힘이 회복되는 것을 느낀다. 문학상 심사를 핑계 삼아 다시 읽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