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평론가들은 방탄소년단(BTS)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자기 정체성의 화려한 시각화’를 꼽는다. 멤버 제이홉(본명 정호석·31)이 그간 선보여 온 솔로 앨범 2장 또한 그 연장선상을 충실히 따라왔다. 그가 2022년 선보인 첫 정규 솔로 1집 ‘Jack In The Box’는 자신의 예명을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남은 희망에 빗대 풀어낸 것. 제이홉이 미리 녹음해 뒀던 음원들로 지난해 군복무 중 발매한 스페셜 앨범 ‘HOPE ON THE STREET VOL.1’은 데뷔 전 스트리트 댄서로 활동했던 자신의 뿌리를 상기시키는 소리들로 가득 채웠다.
지난 3월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그의 첫 솔로 투어 콘서트 ‘j-hope Tour ‘HOPE ON THE STAGE’ in SEOUL’에선 그 같은 특장점을 한층 더 진화시키기 위한 고민이 엿보였다. 공연 문을 연 첫 곡 ‘What if…’부터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무대 위를 가득 메운 25개의 박스형 리프트 무대 장치. 곡의 선율과 가사의 흐름에 따라 시시때때로 색과 높낮이를 달리하는 이 박스들은 제이홉 1집의 주제였던 판도라의 상자를 단번에 연상시켰다.
최대 3m 높이까지 올라가는 이 박스들 위에서 펼쳐진 대부분의 퍼포먼스는 화염 기둥과 불꽃, 레이저 등을 동원한 만큼 화려했고, 난해하기보단 직관적이어서 손쉽게 공연 열기를 끌어올렸다. 제이홉은 이 박스들 위를 뛰어다니며 때로는 주머니에서 꺼내 든 실제 라이터에 위태롭게 불을 붙이고(공연곡 ‘방화(Arson)’), 때로는 박스 사이로 가져온 침대에 뛰어들며 낮잠을 즐기듯(공연곡 ‘데이드림’) 노래를 불렀다. 스페셜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on the Street’은 자유로운 스트리트 댄서를 닮은 나비들의 그림자 형상들로 박스를 꾸몄고, 장내에는 실제 나비 모양 종이가루도 듬뿍 뿌렸다. 그때마다 객석을 메운 1만2500여명의 아미(Army·BTS 팬덤명)들이 찢어지는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이어진 제이홉의 콘서트는 3일간 3만7500여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이번 서울 공연은 제이홉이 오는 6월까지 데뷔 12년 만에 처음 개최하는 솔로 월드투어의 포문을 여는 무대다. 서울을 비롯해 브루클린, 시카고, 멕시코 시티, 샌 안토니오, 오클랜드, 로스앤젤레스 등 북미를 비롯해 마닐라, 사이타마, 싱가포르, 자카르타, 방콕, 마카오, 타이베이, 오사카 등 총 15개 도시에서 31회 공연으로 전 세계 아미들을 만난다는 계획. 솔로 투어 공연이 마무리되는 6월은 BTS 멤버들 전원이 군복무를 완료하는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완전체 활동에 대한 아미들의 기대감을 제이홉이 예열시키는 셈이다. 제이홉은 서울 공연의 마지막 회차인 2일 무대에서 “2022년 부산에서 가진 BTS 공연(옛 투 컴 인 부산) 이후 무려 3년 만의 (단독) 공연”이라며 “전 무대와 공연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는 제이홉보다 앞서 지난해 팀 내 예비역 멤버가 된 진도 응원차 직접 객석을 찾아 팬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빅히트뮤직에 따르면 제이홉은 이번 콘서트 기획과 구성, 연출 전반에 직접 참여했다고 한다. 약 2시간 30분 동안 총 21곡을 ‘야망, 꿈, 기대, 상상, 소원’ 등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눠 선보였다. 2015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 발표한 노래 ‘1 Verse’, 비정규 앨범인 믹스테이프 ‘호프 월드(Hope World)’와 정규 1집과 스페셜 앨범, BTS 활동기에 낸 솔로곡, 그리고 오는 7일 발표 예정인 신곡 ‘Sweet Dream’까지. 그간의 솔로 활동을 총망라하는 다채로운 선곡을 선보였다.
각 곡들의 무대 면면은 지난 18개월의 군복무 기간이 제이홉에겐 상실이 아닌 보충의 시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솔로곡보다 오히려 그룹 단체곡인 ‘MIC DROP’과 ‘뱁새’, ‘병’ 등을 혼자 부를 때 두드러졌다. 그는 콘서트 전반에 걸쳐 명료한 밴드 사운드를 전면 배치했는데, 그룹곡들을 부를 때도 선 굵은 기타 사운드가 도드라지는 편곡과 자신의 스트리트 댄서 정체성을 조화시킨 군무를 적극 앞세웠다. ‘MIC DROP’의 경우 BTS가 투어 활동을 재개했을 때 완전체 모습으로 적용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만큼 높은 짜임새를 보여줬다.
제이홉이 총 5개 주제 중 2번째로 선보인 ‘Dream on Stage’ 순서는 그가 스스로에게 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인상을 줬다. 제이홉은 2일 공연 중 이 순서에서 “스트리트 댄서로 출발한 내 뿌리를 진정성 있게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스트리트 댄스란 장르 자체를 주제로 무대를 풀 수 있는 아티스트가 몇 분이나 계실까”란 고민으로 만들었다는 스페셜 앨범 ‘HOPE ON THE STREET VOL.1’의 수록 곡들만으로 이 순서를 꾸린 이유였다. 이 앨범에서 멤버 정국의 피처링을 더해 수록했던 ‘i Wonder…’는 간결하지만 달콤한 베이스라인이 돋보이는 미디움 템포의 알앤비 원곡을 충실히 실어내는 편곡을 선보였는데, 전 무대를 통틀어 가장 제이홉의 중저음 음색을 잘 살린 순간이었다. 제이홉이 이날 무대에서 음원 발매보다 라이브로 선 공개한 신곡 ‘Sweet Dream’ 역시 노래하듯 읊조리는 멜로딕 랩이 그의 중저음 음색과 잘 어울리는 미디엄 템포 알앤비곡이었다.
제이홉은 오는 10일(현지시각) 미국 NBC의 간판 토크 쇼인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펄론’에서도 신곡 무대를 비롯한 솔로 공연을 이어간다. 그는 2일 서울 공연 막바지 즈음 “무대는 저의 세이프티 존(Safety Zone, 안전지대)”이라며 이렇게 외쳤다. “전 무대와 공연장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즐거운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고 랩 하는, 여러분의 좋은 희망(HOPE)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