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인이 될 거야, 어두운 세상 헤쳐가며….”(주제가 ‘야인’)

공중 부양 발차기로 결투에서 이긴 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야인시대' 주인공 '김두한'(배우 안재모). 격랑의 근대사 한복판을 살아낸 김두한의 인생사를 그렸다. 최근 넷플릭스에 '야인시대'를 비롯해 2000년대 인기 드라마들이 공개되며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 /SBS

2002년 7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야인시대’ 최고 시청률은 51%에 달했다. 삐딱하게 쓴 중절모 아래로 빛나는 주인공의 눈빛이 시청자에게 기쁨과 용기를 줬던 명실상부한 ‘국민 드라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드라마가 다시 화제다. 지난달 24일 넷플릭스에 고화질로 공개돼 재시청 바람이 불고 있다. ‘야인시대’와 함께 ‘모래시계’ ‘올인’ ‘천국의 계단’ ‘여인천하’ ‘아내의 유혹’ 등 2000년대 전후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들도 공개돼 화제다.

2000년대는 TV 드라마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드라마가 많이 나왔던 시기다.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에 대한 갈증이 구작을 다시 찾게 한다는 설명도 나온다.

◇과거 ‘레전드’ 드라마 재소비 활발

올해 넷플릭스에 구작이 대거 등장한 건 작년 말 SBS와 맺은 파트너십 협약을 계기로 옛 드라마 발굴에 나섰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신작 외에도 ‘레트로 TV’ 카테고리 안에서 해외 구작들을 다수 제공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내 구작 드라마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구독자의 반응과 화제성을 모두 챙겼다. “고화질로 다시 보게 돼 좋다” “연휴 동안 몰아보며 추억 여행을 했다” 같은 반응이 이어졌고, 올 들어 넷플릭스 앱을 매일 켜는 일간활성화지수(DAU·모바일인덱스 집계)가 지난 4분기 평균 대비 50만명 가까이 늘어나는 데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카지노를 배경으로 청춘의 승부사와 사랑을 그린 '올인'(왼쪽)과 선과 악이 대립하며 빚어지는 네 남녀의 처절한 사랑 이야기인 '천국의 계단'.

◇“요즘 없는 보편적 이야기의 힘”

화질을 향상해 OTT에 공개했지만 요즘 드라마의 연출과 비교해 2000년대 드라마는 구식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명작’ ‘인생 드라마’로 꼽고 있다. 그 이유를 추억 때문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2000년대 드라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드라마 평론가)는 “‘올인’ ‘야인시대’ 등 2000년대 인기 드라마의 위용은 대단했다. 국민의 절반 가까운 시청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동시대인의 보편적인 공감을 부르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에 가치를 잃지 않는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국내 뿐 아니다. 국내에 팬이 많은 일본 드라마 역시 ’하얀거탑’ 등이 나왔던 2000년대가 전성기로 꼽힌다. 최근 넷플릭스에는 2000년대 일본 드라마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이런 ‘명작’이 요즘엔 드물어 ‘구작 재소비’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있다. 윤 교수는 “드라마가 2000년대 이후로 발전해온 것은 맞지만 문제 의식 뛰어난 작품의 기획과 발굴은 오히려 약화된 측면이 있다”며 “지상파 드라마가 힘을 못 쓰고 OTT로 중심이 넘어가면서 ‘좋은’ 드라마가 나올 환경은 약화된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측면 때문에 특정 장르에 편중됐던 넷플릭스가 올해 국내 작품 다양성 강화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다.

◇국내 OTT 설 자리 뺏기 우려도

넷플릭스 기존 구독자들은 이용할 수 있는 작품이 신작 외에 구작으로 넓어져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일각에선 글로벌 OTT가 국내 OTT 밥그릇까지 뺏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앞서 국내 OTT 웨이브가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통해 ‘내 이름은 김삼순’ ‘궁’ ‘커피프린스 1호점’ ‘풀하우스’ ‘겨울연가’ 등 2000년대 드라마를 고화질로 새롭게 공개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자본력이 부족해 신작을 활발히 만들기 어려운 국내 OTT가 인기 구작을 활용해 활로를 찾으려 한 것이다. OTT 업계에서는 “국내 구작을 선별하고 공개하는 주도권까지 글로벌 OTT에 내주게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