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희 작가가 전시장 로비에 걸린 그림 ‘북원’ 앞에 섰다. 프랑스 투렌 작업실에서 낫 들고 직접 땅을 일구며 매일 보고 매만진 땅이 가로 4.62m, 세로 5.28m 대작으로 탄생했다. 팔순을 앞두고 한국에서 36년 만에 미술관 전시를 여는 작가는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전시장 로비에 초대형 회화가 걸렸다. 가로 4.62m, 세로 5.28m. 초록과 붉은색이 엉겨붙어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북원(北園)’이다. 프랑스 투렌 지역, 18세기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화가 강명희(78)는 낫을 들고 땅을 일구며 매일 보고 만진 그 땅을 그렸다. 2002년 시작해 완성까지 8년이 걸렸다.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가져간 물감들을 소진해 버리고 싶었다. 눕힌 캔버스에 물감을 발로 짜내며 작품을 시작했다. 정원에서 낫질을 하다가 다시 붓 들고 그림을 그리면 체력이 보강돼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더라. 밭일을 많이 할 때 오히려 그림이 잘됐다.”

그의 개인전 ‘강명희-방문 Visit’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5년을 여는 첫 전시로, 2023년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김윤신 개인전에 이어 한국 여성 작가를 발굴, 재조명하는 개인전이다. 1986년 한국 여성 작가 최초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를 연 강 작가의 60여 년 화업을 조망한다.

1층 전시장 로비에 걸린 강명희 작가의 '북원'. /서울시립미술관

강명희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72년 프랑스로 떠났다. 1978년 낭트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86년 남편 임세택 화백과 함께 퐁피두센터에서 2인전을 열며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9년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남편과 2인전을 열었지만,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그의 작품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전시는 2007년 귀국해 제주도에서 그린 최신작으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가며 1960년대 초기작까지 125점을 소개한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앞에 선 강명희 작가. /조인원 기자

널찍한 전시장에 걸린 큼직큼직한 대작들은 자연과 소통하며 오랜 시간 곱씹어 함축한 인내의 기록이다. 얼핏 보면 추상화 같지만, 눈앞에 보이는 자연을 옮긴 풍경화다. 몽골의 사막, 황우치 해안, 송악산의 산초나무 가지까지 연필로 데생한 후 캔버스에 옮겼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선(線) 대신 여러 겹의 색과 무수한 붓질로 채워진 그림은,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라산이 되고 동백꽃이 되어 눈앞에 떠오른다. 5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 장소를 반복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그림 한 점 완성하는 데 몇 년을 쏟기도 한다”면서 “제주의 자연 풍경이 미세하게 변화하는 걸 제일 빨리 감지하는 게 나”라고 했다.

전시장 로비에 걸린 '북원' 앞에 서 있는 강명희 작가. /조인원 기자
강명희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장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훌쩍 떠나는 여행에서 가장 큰 영감을 얻는다. 전시 마지막에 볼 수 있는 1960~1980년대 초기작들은 구상적 성격이 강하고 현실에 대해 직접 발언하지만, 1994년 몽골과 칠레를 여행하면서 장엄한 대자연을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여행 이후”라며 “고비사막과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내가 배운 그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걸음마를 새로 시작하듯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광활한 대자연을 표현하려면 큰 화면이 아니면 부족했다”고 했다.

강명희, '레퀴엠'(2024). 캔버스에 유채, 340x288cm. /서울시립미술관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빛과 색을 오래 성찰한 흔적들이 가로세로 4m가 넘는 대작이 됐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사다리에 올라 서서 대형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예전엔 화실 가기 전에 겁부터 났는데 이제는 내가 뭘 그리는지, 내 그림에서 무엇이 예민하게 쓰이는지를 알게 됐다. 마치 새로운 장이 활짝 열린 것 같은 기분”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중국의 왕유가 ‘어느 날 일어났는데 산이 화실에 들어왔더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전시명 ‘방문’은 한곳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작업한 작가의 유목적 태도를 빗댄 말.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강명희 작가의 회화를 감상하며 관객은 마치 경계 없는 자연 속을 거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6월 8일까지. 관람 무료.

강명희 작가가 제주 송악산과 한라산의 다채로운 풍경을 혼합해 그린 ‘초란도’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거는 봉숭아, 엉겅퀴, 저 위는 산초나무 가지... 내 맘에 들 때까지 계속 그리다보면 봄이 몇 번을 지나간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강명희(78)

1947년 대구 출생. 서울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2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1986년 남편 임세택과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2인전을 개최했다. 2005년 베이징 중국미술관을 시작으로 닝보·상하이·황성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 고국에 돌아와 제주 서귀포에 정착해 대자연을 화폭에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