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규와 정지용은 1920년대 교토에서 함께 유학한 절친이었다. 독실한 신자인 정지용 권유로 이태규는 가톨릭에 입교했다. 1929년 세례를 받은 이태규(앞줄 가운데)와 정지용(앞줄 오른쪽 끝)./이태규 박사 전기

‘1세대 화학자 이태규’를 단번에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토제대에서 화학으로 이학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조선인이자 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스타 과학자임에도 그렇다. 동년배 친구 정지용 시인이 누리는 인기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1930년대 이태규(1902~1992)는 정지용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과학사학자 김근배 전북대 교수 얘기다.

이태규와 정지용은 1920년대 교토에서 함께 유학한 지기(知己)였다. 독실한 신자이던 정지용 권유로 이태규는 가톨릭에 입교했다. 교토 유학생 출신인 아내(박인근)를 소개한 이도 정지용이다. 1929년 귀국 후 휘문고보 교사로 일한 정지용은 이효석, 이상, 박태원 등과 ‘구인회’를 만들어 창작 활동을 했고, ‘정지용시집’ ‘백록담’ 등을 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조선인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긴 교토제대 교수가 된 이태규가 훨씬 유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역전된지 오래다. 김근배 교수는 “예전에 조사를 해봤더니 정지용을 다룬 학위논문은 300편이 넘지만 이태규를 다룬 논문은 한 편도 없없다. 과학계에서도 한국인 과학자 이태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하다”고 했다.

이태규가 1930년 5월 조선의 첫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30년5월4일자. 각 신문마다 이태규의 이학박사 취득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조선인 첫 이학박사 취득

‘이태규씨는 충청남도 예산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광도사범학교를 마친 후 경도제국대 이과화학(化學)교실에서 삼년간 수학하고 동 대학 소송무(小松茂 ?)로 연구를 거듭하던 중 금번에 이학박사의 논문을 제출하여 통과한 것이다. 씨는 금년 34세로 조선이 낳은 최초의 이학박사로 각 방면에 기대가 자못 크다.’ (조선 최초 이학박사 京都대학 이태규씨, 조선일보 1931년7월20일)

1931년 7월 신문에 실린 기사다. 조선인이 일본에서 취득한 첫 이학박사였다. 동아일보는 사설(학자배출-학계의 盛事, 1931년7월21일)까지 썼다. ‘돌이켜 우리 사회를 일별하면, 신문명이 수입된지 이미 수십년에 달했건만 10인(서양서 받은 자를 제외)의 의박(醫博), 1인의 이박(理博)을 세일 밖에 없다. 어찌 애오라지 수치할 일이 아니랴. 환경이 여하히 불리하다 할지라도 좀 더 민중의 노력이 있었으면 현재 수 이상의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이 신문은 경성제대에 조선인 교수가 한명도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당국의 조선인 차별정책을 꼬집었다.

1973년 9월 미국, 일본 등 오랜 해외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이태규 교수를 인터뷰한 조선일보 1973년 9월15일자 기사. 한국과학원 석학교수로 자리잡은 이 교수는 20년 가까이 후학을 키워냈다.

◇조선인 첫 교토제대 교수

이태규는 독성있는 일산화탄소 분해 과정에서 니켈의 촉매 작용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연구였다. 당시 연탄을 가정용 연료로 많이 사용했는데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학박사’까지 취득했어도 일자리를 얻을 수없었다. 대공황여파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교 교수 주선으로 교토제대 화학연구소 강사 자리를 얻었고, 사립중학교 시간제 교사로 일했다.

이태규는 대학 졸업후 계속하던 부수(副手) 신분으로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마침내 1935년 4월 교토제대 화학연구소 조교수로 임용됐다. 불가능해 보이던 유리천장을 뚫은 이 쾌거는 뉴스였다. 1935년 5월4일자 조선어 신문은 일제히 그의 교토제대 조교수 임용을 보도했다. ‘이학박사 이태규씨, 京大조교수로, 조선인으로 처음 임명’(조선일보) ‘京都의 이태규박사, 帝大조교수로’(동아일보) ‘조선인 최초의 東帝大조교수, 理博 이태규씨’(조선중앙일보, 교토제대를 동경제대로 잘못 썼다).

이태규의 조교수 임용은 지도교수였던 호리바 신키치(堀場新吉)의 후원이 컸다.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며 동료 교수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1992년 10월 타계한 이태규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교육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사진은 만년의 이태규 교수/조선일보 DB

◇프린스턴대 연수, 아인슈타인과의 만남

이태규는 1938년12월 일본 문부성 재외연구생 자격으로 미국 프린스턴대에 연수를 떠났다. 2년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문적 동지인 헨리 아이링을 만나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아이링은 이론 화학에 양자 역학을 도입한 선구자였다.

미국 체류는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1년 7월 일본 정부의 귀국 명령으로 마감했다. 이태규는 1941년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생길 때 화학과 교수로 지원했으나 교토제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종전 직전인 1944년 12월, 교토제대 교수로 승진했다.

◇교토제대 3인방, 광복 후 과학교육 기여

이태규는 교토제대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후속세대를 길러냈다.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기(공업화학), 박철재(물리학) 등과 함께 교토 3인방으로 불리며 조선인 유학생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이승기, 박철재와 함께 귀국선을 탔다. ‘과학조선’ 건설을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태규는 경성대(경성제대 후신이자 서울대 전신) 초대 이공학부장으로 임명됐다. 1946년 7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案)이 추진되면서 국대안을 둘러싸고 좌우 갈등이 격화됐다.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던 모양이다. 1948년 9월 프린스턴 시절의 동료 아이링이 대학원장으로 있던 미국 유타대로 연구차 떠났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에 눌러앉아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리 아이링 이론 발표, 국제 물리화학계의 거성

이태규는 1955년 ‘리-아이링 이론’이 담긴 논문을 ‘저널 오브 어플라이드 피직스’(Journal of Applied Physics)에 연이어 발표했다. 이론과학 분야에서 한국인의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공식이다. 미국 체류 25년간 9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국제 물리화학계의 거성으로 떠올랐다. 196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후보 추천위원에 위촉됐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그가 재직중인 유타대로 몰려갔다. 이중 20여명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한국이 낳은 세계적 과학자로 자주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태규 교수는 타계 직전까지 밤 12시 넘도록 연구실을 지키며 후학을 지도했다. 일흔 한살에 귀국해 국내외 연구자들과 함께 발표한 논문만 60여편이다. /조선일보 DB

1973년 9월 그는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석학교수로 부임하기 위해 영구 귀국했다. 일흔 한살때였다. 제자 전무식과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직접 방문해 권유했고, 정년없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의 결단을 신문은 환영했다. ‘남은 생애를 고국에’(조선일보 1973년9월15일)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1992년 10월 26일 타계할 때까지 한국과학원의 석학교수로서 국내외 연구자들과 함께 논문 60여편을 발표하고, 후학을 길러냈다. 구순 무렵인 1990년 2편, 1991년 1편의 논문을 썼고, 사후인 1993년에도 연구를 완성한 공저자들이 3편의 논문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평생 200여편의 논문을 국제적 학술지에 발표했다.

타계 직전까지 늘 밤 12시30분에서 1시 사이에야 연구실을 나섰다고 한다. 사후 한국 과학기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과학자로선 처음이었다. 위대한 생애였다.

◇참고자료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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