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훌륭 약사 겸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아독방)’ 대표는 출판사 등록도 했다. 약국 안 서점 코너에서 그간 출판한 책 몇 권을 들어 보였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시리즈. 기성 작가와 신인 작가 등 아독방 독자들이 익명으로 쓴 글을 모았다./박성원 기자

심한 감기에 걸려 콜록대며 서점을 찾았다. 골골대는 기자의 상태를 보더니 박훌륭(44) ‘아직 독립 못 한 책방’ 대표가 온장고에서 따끈한 향갈탕을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드세요.” 병을 따니 한방 약재 냄새가 훅 났다. 손끝에 온기가 퍼졌다. 약국을 겸한 서점을 취재하기 맞춤인 날이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푸른약국’은 언뜻 지나칠 땐 흔한 동네 약국 같다. 유심히 보면 뭔가 이상하다. 바깥 유리에 약 광고와 책 광고가 함께 붙었다. 이색 조합엔 이유가 있다. 약국 안에 서점이 있다. 이름하여 ‘아직 독립 못 한 책방’. 단골들은 줄여서 ‘아독방’으로 부른다. 약국과 책방의 독특한 공생(共生)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 대표는 약국을 “답답한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종일 있어야 하고, 패턴이 정해져 있어요. 수동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재미 추구형 약사’가 능동적으로 사람을 만나고자 택한 전략이 약국 안 서점이다. 그는 “오랜만에 오프라인 모임으로 ‘현피’ 이벤트를 한번 할까 싶다”고 했다. 현실에서 만나 싸움을 벌인다는 그 뜻인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박 대표가 해명했다. “현장에서 피자 먹는 이벤트요. 피자 뷔페를 열어서 책 사고 피자 먹는 행사 어때요?”

약국 안 서점 풍경. 인공 눈물과 책을 한 번에 살 수 있다. /박성원 기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푸른약국' 안에 있는 서점 '아직 독립 못한 책방'에 손님들이 쓰고 간 메모들. /박성원 기자

약국은 2012년, 서점은 그때부터 6년 뒤인 2018년에 시작했다. 과거엔 약국 한쪽에서 화장품을 팔았다. 2010년 이후 대기업이 경쟁적으로 화장품을 파는 ‘한국형 드러그 스토어’를 열기 시작하면서 약국의 화장품 매출이 떨어졌다. 화장품 대신 무엇으로 매대를 채울까 고민하던 차, 생각이 책으로 튀었다. “그 당시에 제가 책을 좀 많이 읽고 있었거든요. 2~3일에 한 번 택배가 오니까, 책을 좀 싸게 살 수 없나? 책방을 한번 해볼까?” 그게 시작이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하루이틀에 걸쳐 ‘아독방’만의 책 리뷰를 올렸다. 그의 글을 읽고 책을 주문하는 고객이 쌓였다. 주기적으로 서점을 찾고 온라인 주문을 넣는 단골 200여 명을 확보한 비결이다. 어느 정도 취향을 아는 고객에겐 대표가 직접 연락한다. “‘이거 안 사요? 사야 할 것 같은데’ 하고 문자도 보내요.” 주문 제작한 슬라이딩 도어 책장 한 칸으로 시작한 약국 안 서점은 찾아오는 사람이 늘며 야금야금 자리를 넓혔다. 지금은 책 더미와 책 배송을 위한 주황색 택배 봉투가 약국 곳곳을 침범 중이다. 손님이 붙이고 간 스티커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약사님의 부캐도, 본캐도 응원합니다.’

약국 바깥에 책 광고와 약 광고가 함께 붙어 있다. /박성원 기자

각종 기념품은 물론, 출판사와 협의해 한정판도 낸다. 최근엔 알베르 카뮈의 ‘계엄령’(녹색광선)을 ‘아독방’ 한정판으로 100부 찍었다. 서점을 찾는 손님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취지다. 북토크를 진행할 땐 약국을 찾는 손님이 난입(?)하는 경우가 잦아 셔터를 내린다. 북토크에 지각하면 반쯤 내린 셔터 밑으로 몸을 구겨 입장해야 한다. 지난해 7월엔 ‘책방연희’를 운영하는 구선아 작가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책 읽다 절교할 뻔’(그래도봄)이라는 책을 펴냈다. 과거 진행한 행사에서 이름을 땄다. 책방을 찾는 손님을 연결해 책 선물을 하게끔 하고, 책을 받은 사람은 한 달 안에 리뷰를 쓰게끔 했다. “600쪽짜리 책을 선물받은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하루에 30쪽씩 계획을 짜서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책 읽다 절교할 뻔한 거죠(웃음).”

박 대표에게 “언젠가 독립을 꿈꾸냐”고 묻자 “그건 아니다”라고 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 손님들은 ‘여기는 좀 더 노력해서 독립하려나?’ 생각하시더라고요.” 오프라인 손님을 따지면 약국 대 서점 손님 비율은 약 9대1. 약을 사러 왔다가 책을 사는 손님은 흔치 않다. 책을 사러 온 손님이 약국에 온 김에 해열·진통제 등 상비약을 사서 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현실적으로 책방 독립은 어려울뿐더러 원치도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아직’이란 부사는 왜 붙였을까. “책방 운영 초기에 자기만의 주관이 뚜렷한 독립 서점을 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저기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중의적 의미를 담은 거죠. 어감이 재밌잖아요.”

장르를 가리진 않지만, 문학 도서 비중이 크다. 정해연·조영주 등 다섯 소설가가 마티스 그림의 영감을 받아 쓴 스릴러 단편선 ‘마티스x스릴러’(마티스블루) 친필 사인본이 매대에 여러 권 놓여 있었다. 박 대표는 “재밌겠다 싶은 책은 잡다하게 갖다 놓는다”고 했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이소노미아)이 입구에 진열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농담의 기저에 흐르는 위트의 원리’(예랑)도 박 대표가 자주 추천하는 책이다.

“약국 경영에 도움이 되면서 약국 안에서 할 수 있는, 나에게도 재미있는 것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박 대표는 “책의 물성을 숭배하고, 책은 고귀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저희 책방을 싫어할 수도 있다”며 “책을 읽을 때뿐 아니라 책을 살 때조차도 재미있는 책방을 꾸리고 싶다”고 했다. ‘아독방’ 소셜미디어엔 박 대표의 팝핀 영상이 책 홍보와 함께 올라오기도 한다. ‘이게 책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싶지만 약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업력 8년 차 ‘아독방’의 운영 철학은 ‘재미’로 수렴한다. 책방 슬로건은 ‘북 앤 펀(Book&Fun)’이다.

'아직 독립 못한 책방'을 운영하는 박훌륭 약사 겸 책방 대표. /박성원 기자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의 PICK!]

●환절기 추천 도서=‘배반 인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죽음’(은행나무). 계절이나 환경이 바뀔 때 읽어봄 직하다. 죽음 전후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다독가를 위한 영양제= ‘몸이 1000냥이라면 눈이 900냥’이라는 말도 있다. 안구 건조를 완화해 주는 간유가 포함된 눈 영양제를 챙기면 좋다.

●온 김에 충동구매=늘 있다가도 찾을 때 없는 것이 상비약. 기본적인 소화제, 해열·진통제, 상처 치료제 등을 ‘아독방’ 슬로건이 적힌 에코백에 담아 가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