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서 조촐한 행사가 있었다. 애국지사 송몽규의 80주기 추모 헌화식이었다. 고인의 조카인 탈북 작가 송시연이 간단한 추도사를 했다. “삼촌의 고귀한 뜻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영화 ‘동주’를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윤동주인지 송몽규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박정민이 연기한 송몽규는 활달한 성격이고, 강하늘이 분한 윤동주는 얌전한 성격이었다.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 같은 집에서 3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형 몽규는 명동학교 5학년 때 어린이 잡지 ‘새명동’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고, 동주는 형을 도왔다. 몽규는 수필과 동화를, 동주는 동시를 썼다.

1934년 12월 몽규의 집에 ‘신춘문예 꽁트 부문 당선’이라는 전보가 온다. 이 소식에 자극받아 동주는 처음으로 동시가 아닌 시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를 쓴다. 동주가 평양 숭실중 3학년 2학기로 편입했을 때 몽규는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진로 상담을 한 뒤 난징군관학교에 입학하고 훗날 지난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한다. 그래서 1936년 4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 뒤 석방된다.

두 사람은 연희전문 핀슨관 기숙사(현 윤동주기념관)에서 다시 만난다. 연희전문 시절 몽규는 “고요한 침전된 어둠 만질 듯 무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밤’),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와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하늘과 더불어’) 같은 시를 쓰지만 꿈은 광복을 위한 실력 배양에 있었다. 1942년 4월, 그는 교토제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같은 시점에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한 동주가 그 학교에 계속 다녔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10월에 동주가 몽규가 있는 교토로 가 도시샤대학 문학부(영문학 전공)로 편입하지 않았더라면? 사상범을 다루는 특고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몽규 옆에 동주가 와서 찰떡같이 붙어 다녔으니 곱게 보였을 리 없다. 1943년 7월 14일에 체포되어 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몽규는 3주 뒤인 3월 7일에 숨을 거둔다. 두 사람 다 스물여덟 청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