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21번째 레터19일 개봉하는 영화 ‘블랙백’입니다. 오늘(12일) 시사회를 했는데요, 오, 재밌었습니다. 아내를 첩자로 의심하게 된 스파이가 진실을 파헤쳐나가는 두뇌 게임인데요, 90분간 영화관에 앉아 아무런 부담 없이 즐기고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영화를 찾고 계셨다면, 이 영화입니다. 어딘가 숨겨진 은유를 찾아내 해석해내야 할 것 같은 거장 감독의 영화, 심오한 주제 의식에 동감 안 해주면 안 될 것 같은 영화제 수상 영화. 그런 영화는 소화불량 걸릴 것 같다면 역시 이 영화입니다. ‘그 영화 어때’ 초창기엔 시사회 당일에 짧은 레터도 보내드리곤 했는데 최근엔 너무 중후장대형으로만 보내드린 거 같아서 반성 중이던 차, 짧고 굵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라 후다닥 보내드려봅니다.(‘콘클라베’가 왜 별로였는지를 쓰다 중지하고 이것부터) 특히 감독하고 두뇌싸움하기를 즐기신다면(‘어디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나 보겠어’) 더더욱. 게다가 도전장을 던진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 주연 배우가 케이트 블란쳇과 마이클 파스벤더라면 해볼만하지 않을까요.

우선 제목부터. ‘블랙백’은 우리말론 검정 가방인데, 비밀이 간직된 은밀한 공간이나 장소, 혹은 비밀 자체를 의미합니다. 비밀과 거짓말은 스파이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의 핵심 단어이기도 한데요, 영국 정보국 스파이인 케이트 블란쳇과 마이클 파스벤더 부부는 일상에서 이런 대화를 하게 돼요. “내일 출장 어디로 가?” “그건 블랙백이야.” 즉, 알려줄 수 없다는 말 대신에 “블랙백이다”라고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블랙백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암시이자 암호이기도 합니다. 어디 스파이만 그렇던가요. 보통 사람들도 다 그렇죠. 비밀이 있고 거짓말을 하고.

영화는 조직 내부 첩자로 5명의 후보가 지목되면서 시작합니다. 그 첩자가 조직의 중요 자산을 외부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빨리 찾아내야 해요. 팔아넘긴 건 세버러스로 불리는 사이버 무기인데 이게 뭔지는 여느 스파이 영화가 그렇듯 맥거핀이니 무시하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3편에서 톰 크루즈가 ‘토끼발’을 찾아 달리고 또 달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수시로 “래빗풋을 찾아야해!” “래빗풋은 어딨냐!” 외치는데 정작 래빗풋이 뭐길래 그러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죠. 맥거핀이란 그런 것이니.

첩자 후보 5명 중에 아내가 포함되고, 남편은 첩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직장은 물론 부부생활까지 붕괴될 위기에 몰리죠. 남편은 나머지 4명을 떠보려고 일요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데요, 직접 만든 요리에 약을 섞어요. 진실만 말하게 하는 약. 초대받은 4명은 요리를 먹고 아무말 대잔치처럼 속내를 털어놓게 되는데, 결국 한 여성이 스테이크칼을 남친의 손에 내리꽂는 사고까지 발생합니다. 역시 지나친 진실은 위험한 법이죠.

이 저녁 자리를 무심히 넘기지 마세요. 이날의 아무말 대잔치에는 해답을 찾아낼 단서가 교묘하게 들어있거든요. 이외에도 단서는 무심한 듯 지나가는 등장인물 대화 곳곳에 조각 그림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저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아, 그랬구나’ 했습니다. 요즘에 이런 재미를 제대로 살리는 영화는 멸종 위기종이 돼버렸죠. 반전을 위한 반전이나 무리한 뒤틀기로 ‘옛다, 결론’이라는 듯 냅다 던져주고 마는 경우가 흔해졌으니까요. 그래서 ‘블랙백’처럼 직선을 따라 정공법으로 풀어나가는 전통적인 방식은 신선하게까지 느껴졌네요. 특히 첩자의 정체가 폭로되는 저녁 테이블에서 울려퍼진 주저함 없는 한 방은 그 배우(!)가 해서 그런지 유독 시원하고 깔끔했습니다.

배우 얘길 안할 수 없네요. 의심받는 아내 역의 케이트 블란쳇은 첩자인지 아닌지 끝까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몽롱한 매력을 뿜어내는데, 그 매력이 마이클 파스벤더의 철저하게 각 잡힌 스파이 연기와 만나서 수수께끼의 한껏 난도를 높입니다. 아, 케이트 블란쳇이 지금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연극하고 있는 거 아셨나요.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아르카지나 역으로 나오는데, 상대역 트리고린이 바로 이 영화에서 첩자 후보이자 동료 스파이로 나오는 톰 버크입니다. 톰 버크는 얼굴 보면 익숙하실 거에요. 작년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 전투 트럭 몰던 근위대장 잭으로 나왔던 배우입니다. ‘퓨리오사’에선 그리 충직하더니 ‘블랙백’에선 상습적 바람둥이로 나옵니다. ‘블랙백’ 보다가 퓨리오사가 잭에게 “나와 함께 가자”던 장면이 떠올라서 갑자기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지더군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는 국내 개봉작으론 오랜만인데 ‘블랙백’에서 감독, 촬영, 편집까지 혼자서 뚝닥뚝닥 다했다고 합니다. 데뷔작이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불과 26세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최연소로 받고(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 이후에 범작도 여럿 만들었지만 ‘오션스 일레븐’ 등에서 보여줬던 대중적 감각, 특히 다수의 등장인물이 교차할 때 생겨나는 리듬의 배분에선 여전히 고수더군요. 범작 몇 편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블랙잭’ 같은 영화도 만들고, 만약 가능하면 나이 더 들어 칸에도 한 번 더 가보고, 그러면서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대중예술인의 보람이자 사명, 혹은 스스로 부여한 운명이겠죠. 그런 대중예술인들의 도전 혹은 제안을 음미하면서 여러분만의 즐거움을 찾아나가시길 응원하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