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17’ 홍보를 위해 최근 미국 토크쇼에 출연한 봉준호 감독이 “그런 영화는 못 만들겠다”고 밝힌 장르가 있다. 다름 아닌 뮤지컬 영화다. 봉 감독은 “뮤지컬 하시는 분들을 존경하지만 제가 찍지는 못할 것 같다”며 “멀쩡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걸 못 견디겠다”고 말해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봉 감독의 생각에 동감할 감독이 많다. 프랑스 대표 감독인 자크 오디아르(73)도 그랬다. 오디아르 역시 간혹 오페라나 볼 뿐 ‘대사하다 노래하다니 못 견뎌’ 쪽이었다. 그랬던 그가 일흔 넘어 생각을 바꿔 만든 뮤지컬 영화가 ‘에밀리아 페레즈’다. 칠순 대가의 도전작은 올해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상을 포함해 최다 부문인 13부문 후보에 오르고도 여우조연·주제가상 2부문 수상에 그쳤다. 지난해 5월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상상 못 한 결과였다.
◇아카데미 최다 후보였으나 2부문 그쳐
‘에밀리아 페레즈’의 쾌속 질주는 골든글로브와 크리틱스초이스 작품상을 거쳐 아카데미 후보 발표 뒤에도 이어졌다. 살육을 서슴지 않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두목이 사실은 여성이 되길 평생 꿈꿔왔다는 설정부터가 매력적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을 대표하는 남성이 여성성을 갈구한다는 역설에 오디아르 감독도 사로잡혔다. 오디아르는 “뮤지컬이 왜 싫은지 아는 내가 관객 입장에서 만들어보자”고 나섰다. 이야기 중심에 선 트랜스젠더의 정체성 문제도 그의 영역이었다. 변방의 소수자를 스크린으로 불러내는데 능란한 오디아르는 유럽 난민들의 생존 투쟁 한가운데로 관객을 밀어넣은 ‘디판’(2015)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번에 오디아르는 담대한 수를 뒀다. 마약 두목 마니타스에서 시민운동가 에밀리아로 성별을 바꿔 다시 태어난 주인공에 실제 트랜스젠더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을 내세웠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트렌스젠더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가스콘은 때론 차갑게 절제하고, 때론 뜨겁게 터뜨리며 과감하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넘나든다. 뉴욕타임스도 “가스콘이 이 영화의 심장이자 영혼”이라고 극찬했다.
문제는 작품의 ‘심장이자 영혼’이 폭주하는 혐오의 기관차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터졌다. 가스콘은 수년 전 흑인과 무슬림, 아시아인을 향한 전방위 힐난을 소셜미디어에 쏟아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잠잠해졌던 멕시코인들의 반발(“멕시코 마약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과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비판(“피상적인 묘사다”)까지 뒤늦게 몸집을 키우면서 아카데미로 향하던 희망의 불꽃은 꺼져버렸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격정과 구원의 드라마
그럼에도 이 영화를 수상 여부로만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초현실적이면서 과감한 안무와 감각적인 노래로 스크린을 휘감는 격정과 구원의 드라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주요 시상식의 여우조연상을 휩쓴 조이 살다냐는 변호사 리타 역을 맡아 빠르고 격렬한 안무와 도발적인 노래들을 탁월하게 소화한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나쁜 사람들(El Mal)’에선 그녀의 눈빛만으로 어둠이 밝혀질 듯 격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뮤지컬 영화로서도 뛰어나다. 영화에 뮤지컬을 입히면 대사만으론 드러내지 못할 인물 내면의 격랑으로 관객을 데려갈 수 있다. 잘 만든 뮤지컬 넘버는 내적인 갈등과 외적인 현실을 극적으로 교차시켜 감정을 끌어올린다. 고모로 변해 나타난 아빠를 몰라본 어린 아들의 애절한 노래 ‘아빠(Papa)’, 에밀리아가 마침내 과거와 화해하고 속죄하듯 부르는 ‘나를 용서해(Perdoname)’는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고도 내내 절절하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수난은 유명인을 태우고 자본의 바다를 항해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고뇌를 보여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 겨울 ‘소방관’은 음주 운전 물의의 곽도원 때문에 좌초 위기에 몰렸으며, 오는 26일 개봉하는 ‘승부’는 주연 유아인의 마약 논란에 영영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쓸 뻔했다. 그래서 가스콘이 부르는 ‘나를 용서해’는 더 깊이 울린다. 안착과 불시착 사이, 아슬아슬하게 국내 관객을 찾아온 ‘에밀리아 페레즈’는 12일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