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해방촌 고요서사. 문이 열릴 때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들어왔다. 출판 시장 주 고객층이 30~40대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색적인 풍경이다. 차경희(41) 고요서사 대표는 “처음 서점을 시작했을 땐 30대 여성 손님이 많았는데, 인근 신흥시장이 리노베이션 후 데이트 코스로 뜨면서 20대 커플 손님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주말이면 손님들이 하나같이 꽃을 들고 들어와요. 서로 선물한 건가 봐요. 요즘 20대 남녀 갈등이 심하다는데, 여기는 정말 ‘사랑이 꽃 피는 동네’랍니다.”
고요서사는 특정 주제로 책을 골라 진열하는 ‘큐레이션 서점’ 붐을 불러일으킨 곳.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차 대표가 2015년 고요서사를 열었을 때만 해도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이나 예술책 전문 서점을 제외하곤 서점이라 하면 대개 주제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책을 다 팔았다. 차 대표는 문학 서점을 고집했다. 6평(19㎡) 규모 서점이 보유하고 있는 책 500여 종 중 70~80%가 소설·시·에세이 등 문학이다. “서점을 열며 사회과학 서점 사장님들께 자문을 구했는데 문학은 잘 안 팔린다 하시더라고요. 제 전공도 문학과는 상관없었지만 저는 여가 시간에 주로 소설을 읽었어요. 제가 좋아서 읽는 책을 팔아야 일이라고 생각 안 하고 가볍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고요서사’라는 이름은 ‘목마와 숙녀’를 쓴 시인 박인환이 광복 전후 종로에 차린 서점 ‘마리서사’에서 따왔다. “‘서사(書舍)’라는 단어를 꼭 쓰고 싶었어요. 소설 서점이니 ‘서사(敍事)’라는 동음이의어를 상기시키고 싶기도 했고요. 내면의 고요를 떠올리다가 ‘고요서사’라 이름 지었는데, 당시만 해도 서점 이름에 ‘서사’를 쓰는 곳이 드물어서 택시 기사님들이 ‘절 이름이냐’ 하시더라고요(웃음).”
서점 로고는 책을 펼쳐 책등이 위로 향하게 세운 지붕 모양을 형상화해 직접 디자인했다. 해방촌에 자리를 잡게 된 건 싼 월세가 가장 큰 이유였다. “문학 서점이니 주택가가 어울리겠다 생각했어요. 처음 염두에 둔 곳은 연희동이었는데 월세가 너무 비쌌어요.”
교통도 불편하고 언덕 경사도 심한 동네 서점을 누가 일부러 찾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와 이언 매큐언 소설 ‘속죄’를 판 것을 시작으로 금세 소문이 났다. 차 대표는 “한국문학 세대교체 시기에 문학 서점을 열어 운때가 들어맞았다. 최은영, 강화길, 김금희, 백수린, 최진영 등 젊은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일며 많은 분이 문학을 주목했다”고 했다. “굵직한 인문·사회 저자들만 북토크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보니 독자 열 명만 모으면 젊은 소설가들도 충분히 토크를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최진영, 박상영, 김초엽, 조해진 등 지금 한국문학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연달아 모셨어요.”
서점은 책만 파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책과 관련된 여러 행사를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이 책 내용과 어울리는 와인을 소믈리에에게 추천받아 마시며 읽는 모임 ‘북스 앤 코르크’다. “‘와인으로 쓰는 독후감’이라 생각하고 기획했어요. 주로 소규모 출판사에서 일한 터라 마케팅에 많이 참여한 경험 덕을 봤어요.”
승승장구하며 확장을 생각할 때쯤 코로나가 덮쳤다. 거리 두기로 토크도 독서 모임도 접어야 했고, 손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닫아야 하나 고민하느니 버티며 그간 미뤄둔 일을 하기로 결심했죠. 월세 등 고정 비용이 적으니 가능한 일이었어요.” 서점 웹사이트를 만들어 ‘당신을 위한 읽기 목록’이라는 책 추천 코너를 열었고, 자동 결제 시스템을 구축해 인건비를 최소화했다. 사무실로 쓰던 안쪽 공간에 고타쓰(일본식 난방 기구)를 놓고 ‘숨어 읽기 좋은 방’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인 독서 공간으로 예약을 받아 대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평일엔 40~50명, 주말 70~80명가량 손님이 들고, 한 달에 400~500종 정도를 판매한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엔 인상 깊은 페이지마다 인덱스를 남겨 놓는데 새 책과 함께 진열하면 판매 효과가 좋아요. 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메모’는 한 달에 열 부 이상 입고하는데 없어서 못 팔 때도 많습니다.”
고요서사는 올 10월이면 꼭 10주년을 맞는다. “오래오래 있는 서점을 한번 해 보자. 진짜 ‘한자리’에 있는 서점이 돼 보자. 오래오래 있되 안주하지 말자.” 차 대표가 코로나 이후 세운 목표다. 매일 저녁 그는 전등 하나를 켜 놓은 채 서점 문을 닫는다. 도시의 골목 한 귀퉁이,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불 하나 밝히고자.
[고요서사의 PICK!]
●고요서사만의 베스트셀러=지난해 11월 우리 서점에서 북토크를 한 소설가 임선우의 ’0000′(위즈덤하우스). 한강의 ‘소년이 온다’ 다음으로 많이 팔린다. 단편 하나만 실린 책이라 작고 가벼워 선물하기 좋기도 하고, 삶이 외롭고 힘들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라고 소개했더니 우리 서점 주 고객인 20대 여성들과 결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책을 들여놓는 기준=문장력, 가독성, 편집. 디자인이 예쁜 책보다는 편집이 잘된 책을 중시한다. 베스트셀러이거나 문학성이 뛰어나더라도 내가 읽기에 어렵다는 느낌이 들면 소개하지 않는다.
●서점에서 가장 자주 트는 음악=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의 곡을 앨범 단위로 튼다. 서정적인 분위기가 이 공간과 맞다고 생각하고, 가사가 있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