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무역 그룹에서 근무하는 강유정(38)씨는 재작년 4월 둘째 ‘선미(태명)’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강씨는 둘째를 몹시 바랐던 터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만원 지하철을 타고 어떻게 출퇴근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람들로 빼곡한 지하철 안에서 임신부석까지 이동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임신부석까지 간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작년 9월 회사에서 임신한 직원에게 ‘연간 택시비 100만원’ 지원을 시작하면서, 고민이 한 번에 해결됐다. 강씨는 “열한 정거장을 내내 서서 가야 하는 게 정말 큰 걱정이었는데, 택시비 지원으로 문제없이 출퇴근할 수 있었다”며 “회사가 임신한 직원들의 어려움을 세심하게 챙겨준다는 사실이 일할 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영원무역 그룹은 룰루레몬·파타고니아 등 글로벌 브랜드의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업체인 ‘영원무역’과 노스페이스 브랜드 국내 판매 업체인 ‘영원아웃도어’ 등으로 이뤄진 회사다. 임신 근로자 ‘연간 택시비 100만원’은 성기학 영원무역 그룹 회장이 직접 만든 회사 제도다.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직원과의 대화에서 “만삭이었을 때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는 고충을 듣고, 임신한 직원들에게 택시 호출 앱인 카카오T 포인트 100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작년 한 해 동안 11명의 직원이 택시비 지원으로 안전하게 출퇴근했다. 포인트 100만원의 사용 기간이 1년이기에 출산 직후 신생아와 이동하거나, 산후검진 받으러 병원 갈 때도 쓸 수 있어 직원들 사이에서 실용적인 지원이라는 반응이 많다.
영원무역 그룹은 회사 내 일·가정 양립 문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올해부터 ‘육아수당’ ‘시차출근제’도 새롭게 도입했다. 이 두 제도는 성래은 영원무역 그룹 부회장이 제안해 만들어졌다. 우선 육아수당은 만 6세 이하 자녀를 키우는 직원에게 회사가 매달 20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직원들은 “회사의 육아수당 덕에 고물가 시대 자녀 양육비 걱정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특히 회사 복지 포인트가 아닌, 현금으로 월급날 지급되기에 각자 가정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곳에 쓸 수 있어 좋다는 분위기다.
이현아(35)씨는 다섯 살 아이의 학원비에 육아 수당을 사용하고 있다. 이씨와 남편이 최대한 일찍 퇴근한다고 해도, 유치원 하원 시간인 오후 4시에 맞춰 퇴근하기는 어렵다 보니 부득이하게 학원을 보내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맞벌이여도 유치원에 학원비까지 다달이 나가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회사 육아 수당이 생긴 이후로 금전적 부담이 확실히 줄었다”고 말했다.
시차출근제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키우는 직원이 대상이다. 하루 근무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출근을 30분 단위로 필요한 만큼 당기거나 늦출 수 있도록 했다. 통상 자녀가 어릴수록 등하원 및 등하교에서 엄마와 아빠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만, 정해진 출퇴근 시간 때문에 부모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시간에 쫓긴다. 그러다 보니 맞벌이 가정에선 조부모나 등하원 도우미 등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 영원무역 그룹은 직원들의 이런 일·육아 병행 고충을 해결해주기 위해 시차출근제를 시작했다.
수출영업팀 윤지영(40)씨는 시차출근제 덕에 등원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아이에게 미안하던 마음을 덜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출근 시간을 딱 30분 늦췄을 뿐인데 직접 아이의 유치원 준비물을 챙기고, 아침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윤씨는 “시차출근제를 통해 일과 육아 병행의 심리적 부담감이 크게 줄었다. 그만큼 근무 시간에 더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같은 팀 박효진(36)씨도 “시차출근제 덕에 아침과 저녁 육아를 남편과 나눠 챙길 수 있게 됐다”며 “분초를 다투며 사는 맞벌이 부부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영원무역 그룹은 직원의 자녀가 초·중학교에 입학하면 축하 의미로 노스페이스 책가방을 선물로 준다. 이후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면 입학 축하금도 지급한다. 연말에는 임직원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 관람 행사를 진행한다. 직원들이 한 해의 끝을 가족과 함께 문화 생활을 즐기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또 임원의 50%, 임직원의 70% 가까이가 여성인 만큼 임신과 출산, 육아를 이유로 직원을 주요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눈치 주는 분위기도 전혀 없다고 한다. 영원무역 그룹 관계자는 “회사에 육아와 커리어 둘 다 놓치지 않고 지켜온 동료, 선배들이 많다 보니 일·가정 양립을 위해 서로 배려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내 문화가 잘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영원무역 그룹은 올해 1월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복지인재원이 주관하는 ‘인구 문제 인식 개선을 위한 릴레이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대한민국이 마주한 인구 절벽 상황에서 기업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이 경영진 사이에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성래은 부회장은 “회사가 여러 사내 제도를 신설하고 저출생 해결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며 ‘회사가 아이를 함께 키워주는 것 같아 든든하다’고 말하는 직원이 많다”며 “앞으로도 일터와 가정 사이에서 직원들이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