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창작 집단 ‘오비어스’ 작가들이 작품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위고 카셀레스-뒤프레, 피에르 포트렐, 고티에 베르니에. 이들이 MRI 기계에 들어가서 상상한 이미지를 AI가 뇌파 분석을 통해 그려낸 풍경화다. /허윤희 기자

2018년 10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인공지능(AI)이 그린 초상화 ‘벨라미가(家)의 에드몽’이 43만2500달러(당시 환율로 약 5억원)에 낙찰됐다. 예상가를 40배 이상 뛰어넘은 가격에 미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얼굴은 흐릿한 그림 속 남성은 가상의 인물. 프랑스의 3인조 창작 집단 ‘오비어스(Obvious)’가 AI를 활용해 만든 이 작품은 AI 그림이 세계 주요 경매에서 낙찰된 첫 사례로 화제를 모았다.

AI가 그린 초상화 ‘벨라미가(家)의 에드몽’. 2018년 10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한화 약 5억원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오비어스의 작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이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지평: IMAGINE’. 인간의 무의식과 AI를 결합해 만든 풍경화와 초상화 등 28점을 선보인다. 오비어스가 파리 브레인 연구소(ICM)와 함께 개발한 ‘마음에서 이미지로(Mind-to-image)’라는 기술을 사용해 만들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AI가 인간의 뇌 속을 들여다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오비어스 작가 3명이 각각 MRI 기계에 들어가서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를 상상하면, 생체 신호를 기반으로 AI가 뇌 안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 전시장에 걸린 풍경화 앞에 서 있는 오비어스 작가들. /선화랑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31세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위고 카셀레스-뒤프레, 피에르 포트렐, 고티에 베르니에. 각각 컴퓨터 공학, 경영, 경제학을 전공했고, 2017년 오비어스를 결성할 때까지 셋 다 예술 관련 경력은 없었다. 이들은 “100년 전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의식적 개입 없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기술로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고자 했다”며 “새로운 기술(AI)로 인간 정신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구현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추구하는 바가 같았다”고 했다.

작업 과정은 마치 의료 실험을 방불케 한다. ①작가가 MRI 기계 안에서 실제 초현실주의 작품 이미지들을 관찰하며 뇌파의 움직임을 수집한다. ②작가에게 짧은 시간 동안 이미지를 보여준 뒤, MRI 안에서 그 이미지를 기억해 내게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뇌파 데이터를 기록한다. ③작가가 자동 기술법으로 생성된 문장을 읽고 그에 따른 이미지를 상상할 때의 뇌파를 기록한다. AI 알고리즘은 이 데이터를 분석해 작가의 상상을 작품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오비어스, 'In the Shadow of a Tsunami'(2024). 작가들은 이런 구절을 읽고 쓰나미를 상상했다. “쓰나미의 그림자 속에서, 목초지의 사람들은 생명으로 가득한 땅을 두고 다툰다. 이제 잠잠해진 혼돈의 힘은 평온하게 떠돌며, 무질서에게 각자의 영혼 깊숙이 품고 있는 달콤한 꿈을 비춰준다." /선화랑

이들은 MRI 기계 안에서 1000개 이상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기억하는 훈련을 했고 이후 자동 기술법으로 자유롭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었다. 작품 옆에 붙은 설명에 힌트가 있다. 가령 파도가 거칠게 일고 있는 풍경화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있다. “쓰나미의 그림자 속에서, 목초지의 사람들은 생명으로 가득한 땅을 두고 다툰다. 이제 잠잠해진 혼돈의 힘은 평온하게 떠돌며...” 작가들은 이 구절을 읽고 ‘쓰나미’를 상상했고, AI가 뇌파를 분석해 풍경화를 그려냈다.

오비어스는 “1년 반동안 MRI 기계 안에 들어가 이미지를 기억하는 훈련은 고통스러웠지만 매혹적인 경험이었다”며 “마침내 우리는 알고리즘을 만들고 상상 속에서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초상화 ‘의미의 파도(Waves of Meaning·2024)’. 작가들은 다음의 구절을 기반으로 '혼란'이란 감정을 표현하는 초상화를 상상했다. "타오르는 오라 속에서, 혼란스러운 불협화음이 땀을 흘리며, 의미의 파도들이 탯줄 같은 힘으로 충돌한다. 그것들은 소멸 속에서도 기쁨을 느낀다." /선화랑

AI로 만든 이 그림을 예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위고 카셀레스-뒤프레는 “이 작품은 결국 우리(인간)의 상상력을 표현한 것이고, 누가 어떻게 상상하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예술”이라며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가 필요한 것처럼 AI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AI라는 도구를 사용했을 뿐, 본인들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오비어스' 작가들이 11일 오후 홍익대 홍문관 가람홀에서 ‘AI와 예술,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선화랑

오비어스는 11일 홍익대 홍문관 가람홀에서 ‘AI와 예술,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로 대담회를 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작업 과정과 저작권, 표절 문제 등 열띤 질문을 던졌다. 오비어스는 “처음 AI와 함께한 작품을 발표했을 때도 창의성과 저작권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한국에서도 같은 질문들을 받고 있다”며 “우리는 실제 존재하는 초현실주의 작품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따라 생성돼 저작권이 없는 이미지를 사용했고, 특정 작가의 작품과는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작가들은 “AI로 생성된 작품은 현재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시는 5월 3일까지. 관람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