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노래하는 가객’. 한국 포크의 대부로 불리는 정태춘(71)·박은옥(68)을 흠모하는 팬들이 이 부부의 발표곡들을 기억할 때마다 떠올리는 수식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때 ‘시대 읽기’를 멈추었다. 2012년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로 이들의 신작 발표가 뚝 끊겼다. 2019년 데뷔 40주년 때 반짝 활동 기지개를 폈지만, 이후 과거 곡을 엮은 기념앨범과 다큐멘터리 영화만을 남겼다. 당시 정태춘은 “더 이상 내 노래는 없다”고 했다.
다시는 노래와 손을 맞잡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13년 만에 다시금 “내 안의 노래”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25일 서울 종로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오는 4월 초 가수 데뷔 45주년을 기념하는 정규 앨범 ‘집중호우 사이’를 발매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 특유의 섬세한 문학적 가사, 솔직 담백한 이야기와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포크 선율을 잘 버무린 10곡이 담길 예정. 같은 달 앨범 수록곡 10편과 미발표가사 20여편 등을 담은 동명의 노래 시집과 붓글집 ‘노래여, 노래여’가 함께 발간되고, 5월부턴 전국 순회공연과 전시도 연다.
두 사람은 이 앨범이 단순한 음악 작업이 아닌 “문학 프로젝트”라고 했다. 라이너 노트에도 “문학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적었다. 정태춘은 “예술적으로 다듬어진 말과 문학이 내게 준 영향에 대한 감사함, 내 음악은 한국문학에게 빚진 결과란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쌩 하니 노래에게 등을 돌린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이 다시금 목소리를 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박은옥은 “정태춘씨가 11년간 노래 만들기를 닫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글을 30편 이상 쓰기 시작했다”며 운을 뗐다. 박은옥은 “당시에는 정태춘씨 글이 길고, 이것만으로는 (노래가 되기에)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 했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정태춘은 한동안 기분이 상했는지 글들을 전부 덮어버리고 다시금 “(노래) 안 만든다”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뒤 새벽, 다시금 박은옥에게 덮었던 글들을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펼쳐 보인 정태춘이 이런 말을 했다. “내 속에서 노래가 자꾸 나와.”
정태춘은 “노래에 관심을 잃고 붓글에만 집중하던 나날 중 밥 딜런을 만났고, 노래를 만들고 싶어졌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우연히 손녀와 함께 찾은 마포도서관에서 밥 딜런에 대한 여러 책과 가사집을 봤다. 내가 이제까지 알던 밥 딜런은 왜곡됐구나 싶었다”며 “그처럼 신나고 파워풀한 밴드 음악을 만들고 싶어져 묵었던 기타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곡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앨범에선 유독 핑거링 주법(손가락 끝으로 현을 뽑아 치는 방식)으로, 좀 얌전한 편에 속하는 10곡을 선곡해 녹음했다”며 웃었다.
1978년 데뷔앨범 ‘시인의 마을’을 발표하며 가수 생활을 시작한 정태춘은 이듬해 방송사 10대 가수상 신인상을 받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4집 ‘떠나가는배/사랑하는 이에게’(1984), 5집 ‘북한강에서’(1985)는 100만장 이상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그는 저항가수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노동운동과 시위 현장 곳곳에서 그의 노래가 불렸고, 가사에선 사회비판적인 시점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2022년 정태춘을 주인공 삼아 개봉한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는 인기 포크 가수와 저항 가수란 그의 두 얼굴이 때때로 충돌하면서도 동반자처럼 상존해 가는 모습이 면밀히 담겼다. 아내 박은옥은 그런 정태춘의 노래들을 목소리로 지탱하는 보컬리스트이자 든든한 동반자였다.
이날 정태춘은 자신이 과거 썼던 사회비판적 음악들을 ‘도구적 노래’로 정의하며 “다시 돌아가도 그런 노래를 쓸 것이다. 그런 노래들이 필요한 시기가 있고, 사람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면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정태춘은 “노화의 과정에서 내 관심사도 변했다. 우리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에서 우주 속의 나를 보는 (관점의) 변화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충실하게 내 이야기를 해왔다”며 “이제 와서 부끄러운 것은 없고, ‘잘 변화했다’거나 ‘내 변화는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새 앨범에 실릴 노래 ‘도리 강변에서’도 ‘떠나고 남는 사람들은 없단다, 다만/길이 여기저기로 흩어질 뿐’과 같이 흘러가는 삶에 대한 조망을 담은 이유다.
10곡의 수록곡 중 ‘민들레 시집’과 ‘폭설, 동백의 노래’ 두 곡은 박은옥이 불렀다. 이날 즉석에서 노래를 선보인 박은옥은 60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청아한 음색을 자랑했다. 그는 “전 항상 ‘절대’란 말을 쓰지 않는데, 어쩌면 이게 우리 마지막 앨범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 노래가 20~30대 마음에 와 닿기는 어려울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며 “소수일지라도 우리 팬클럽에 고등학생·대학생이 있다. 그들과 음악으로 친구가 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감명을 받았어요. 드라마가 세대를 아울러 마음을 흔들 듯 우리 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