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3월 독회 추천작은 김유진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과 현호정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입니다.

/김봉곤
/문학동네
/촬영 홍영주, 연출 박정연
/사계절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평균율 연습

희망 고문을 관두자, 절망에서 현타가 오다.

김유진의 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10)을 읽으면서 AI에게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물어보았다. AI는 꽤 다양한(?) 대답을 주었다.

  1. 2024년 4월 기준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43국 중 52위로 나타났습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평균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약 5.94점으로 150여 국 중 57위에 위치했습니다.
  2. 2024년 5월 기준으로 한국의 지구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38점으로 전체 147국 중 76위로 나타났습니다.
  3. 2024년 5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총점 100점 만점에 45.3점으로 나타났습니다.
  4. 1인당 국내총생산 순위(25위), 기대 수명(3위)에서 매우 높은 순위를 기록했음에도 총 행복지수는 낮은 편입니다.

발표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항목들도 일관되지 않지만, 네 개의 정보가 수렴하는 건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꽤 낮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리고 이는 통상 언론에서 전달하는 정보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갑자기 ‘행복지수’가 궁금해진 까닭은, 김유진의 새 소설, 『평균율 연습』의 주 인물, ‘수민’과 ‘수찬’의 정서가 일종의 만성적 좌절의 상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지만, 그런 소망은 “반복되는 좌절”만을 안겨주었고, 이를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p.55)은 지경까지 이르러 있다. 더욱 처연한 것은 그가 기대하는 것들이 무분별하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안의 아주 작은 소망들’마저도 늘 무너지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삶은 완벽하게 일상화되어서 조금이라도 좋은 기미가 있으면 “이렇게 잘 살아 있어도 되나, 걱정”(p.168)이 될 지경이다.

이런 사정을 선명하게 상징하는 게 첫 부분의 ‘방파제’이다. 바다를 보러 갔더니 그 앞에 키보다 높은 방파제가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방파제는 이중으로 기능한다. 한편으론 인물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 가로막는 장벽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방파제가 차단막이 됨으로써 방파제 안쪽 역시 바다로 흘러가지 못해서 지상을 침수시키는 물의 늪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너머의 바다는 모험의 장소이지만, 안쪽은 인물을 끊임없이 침전시키는 슬픔의 수족관이다.

그러나 기대가 자잘한 만큼 슬픔을 유발하는 좌절들도 인물들에게는 콩알 탄들이 따가운 감각과 함께 자욱이 낸 자국들을 남긴다.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정조는 상처들의 소용량성 이동이 낸 마음 바닥의 표면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상처이면서 동시에 인물 자신이 어루만지고 싶은 귀한 대상들, 추억들이고 꿈들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표면 현상들의 이중적 해석 가능성을 통해서 인물들이 때마다 새로운 생의 의욕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민은 “예술의 과정에 존재하는 사소한 실책의 순간들”(p.201)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가 그 순간을, 생이 자아낸 슬픔을 예술에 투영하면서 예술을 생의 표현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예술의 현실 일탈성에 의해서 예술 교정을 현실 교정의 계기로 만들 줄 알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속적인 좌절은 연속적인 교정 행위와 겹쳐지고, 그 과정 자체가 “고치고 또 고쳐 쓰는 것이 소중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오래되고도 낯선 세계”를 형성하며, 인물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p.202)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끈다.

한데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상투적인 ‘희망 고문’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발생하는 반전은 희망의 불가능성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실마리를 얻는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그것이다. 즉 인물들이 소량의 에너지로 때마다 피우는 의욕은 현실의 구체적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사소한 세목들을 수정해보는 절차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순정율’에서의 탈락이 불협화음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음’의 학습을 거쳐 ‘평균율’의 개발(연습)로 나아가는 음악사의 진화 과정에 투영된다. 요컨대 여기에서 ‘평균율’은 미리 전제된 행복자원(협화음)에 근거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공평하게 쪼개어 새로운 생의 자원으로 쓰겠다는 태도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희망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희망으로부터의 단절’이 그를 살게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인에게 미만한 ‘한(恨)’의 감정과 2000년대부터 두드러진 현상으로 등장한 ‘다이나믹 코리아’ 사이의 어긋남을 이해하기 위해 꽤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한의 격화가 역동성으로 전환되는 알고리즘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을 ‘원한과 설움으로의 침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를 ‘다스림’과 ‘삭힘’이라는 옛날식 해법으로 이해해야 할 게 아니라, ‘무언가에 기대는 마음의 폭락’으로부터의 반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절망의 요지부동으로부터 ‘현타’가 오는 것이다. 이는 그 자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로부터 발견한 ‘인식치유(logotherapy)’의 방식과 유사하다.

그 점에 비추어본다면 김유진식 좌절감은 한의 감정의 축소판이다. 이 축소는 그런데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한→‘다이나믹’의 변환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김유진식 생존법은 좌절과의 일상적 게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 축소판과 확장판 사이의 동형성(homologie)과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소설가의 작은 의욕들에도, 한국인의 요란한 역동성에도 그 반동의 양상은 보이지만, 탄성판의 구조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이 문제에 유독 집중하는 까닭은 그것들에 대한 철저한 해명이 한국인과 소설가의 장래를 얼마간 가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모두에서 살펴본 한국인의 아주 낮은 행복지수가 가리키는 방향을 측량하는 일과도 깊이 연관된다.

♦한 방울의 내가

“새로운 재능이 나타났다!”

아무리 좋아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독서도 오래 하다 보면,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작업의 관성이 주는 피로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럴 때 일어나는 조바심 현상 중 하나가 어떤 말을 한 번쯤 터뜨리고 싶다는 은근한 충동이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해서 묵직한 체증으로 가라앉다가, 긁을 데를 알 수 없는 가려움증으로 바뀌어서 몸 안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그 ‘어떤 말’은 이를테면 “뛰어난 재능이 나타났다!”는 놀람 겸 환호 겸 외침 같은 것이다. 훗날 그 말의 발성자가 ‘페이디피데스’가 될지, 양치기 소년으로 판명이 날지는 나중의 문제로 차치하고서 말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때론 짐작조차 못 했던 어떤 새로움이 실물을 만지는 감각을 안기며 눈앞에 돌출하는 사건에 정신의 두개골 바깥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건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세뇌(洗腦)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 고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환상 소설들을 써왔으며, 지난해에는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단명소녀 투쟁기』, 사계절, 2024)라는 도발적인 언어로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선포했던 현호정은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01)에서, 통상적인 상상력의 울타리를 멀찍이 월장(越墻)한 넓은 생각의 시공에서 다종의 존재들을 춤추게 한다. 첫 소설 「라즈베리 부루」에서부터 어휘 ‘라즈베리’가 내포한 상상적 자원을 저인망에 담아 끌고 다니며 산딸기의 고독과 유혹, 생리혈의 다중적 연상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생명 진화의 한 계기를 환상적인 풍경으로 펼쳐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단어들과 인물들과 사물들과 생물들이 제각기 상상적 복합체로 구성되면서 화응과 비각과 병행 등등의 다양한 양태로 상호 공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날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가 규정했던 대로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소설의 속성을 한껏 활용하여, 이야기와 극과 시들 사이에, 또한 일상 묘사와 옛이야기와 환상 동화들 사이에, 그리고 여러 개의 언어(langues)들 사이에도 특이한 메아리가 울리고 뻗치고 새고 빠져나가는 바람을 일으킨다.

그 밑바닥에는 현실이라는 불가해한 거인 앞에 다윗처럼 언어의 돌멩이를 든 왜소한 자아가 있다. 몸은 작지만 그 작은 크기 덕분에 다른 생명들을 수레로 삼아 질주하기도 하고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기도 한다. 그런 일을 하는 동력은 현실을 뛰어넘어 보겠다는 뜨거운 의지와 더불어 그가 만나는 모든 존재와 사건과 말들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이, 요리해서 먹어 치우는 각종 레시피의 개발이고, 또한 기타 등등일 것이다.

판단컨대 시방 그의 소설은 빅뱅 이후 인플레이션의 상태에서 들끓고 있다. 차후 어떤 소설의 우주가 형성될지는 소설가의 자의식이 여하히 활동하며 우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운동을 거듭할 것인가에 달려 있으려니, 그 향배를 지켜보는 마음이 무심하지는 못하리라.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평균율 연습

먼 곳의 불빛처럼 늘 스러질 듯하면서도 좀처럼 꺼지지 않고,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게 김유진의 소설들인 듯하다. 읽노라면 아득해지면서 또다시 그 어른거리는 푸른빛에 하염없이 빠져들게 되고 마는 이유를 《평균율 연습》에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평균율 연습》에는 ‘이렇다 할’ 갈등이나 사건이 없다. 그러니 서사의 흐름에 큰 기복이 있을 수 없다. 젊은 부부의 남편이 어느 날 스님이 되겠다고 하고, 결국 부부는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짓는다. 아내는 피아노 조율 공부를 시작한다. 이와 같은 사정이 있는데도 갈등이나 사건이 없다고 말하려면 변명이 따라야 할 것 같다.

이혼을 일반적 시각, 즉 ‘이렇다 하게’ 보면 커다란 갈등과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혼 주체들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적 기복이나 심리적 성쇠가 가파를 수밖에 없다. 다만 《평균율 연습》에서 보이는 이혼 주체들의 마음의 무늬는 일반적인 흐름과 무관한 듯 사뭇 다른 결을 지닌다. 격정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그것을 드러내는 김유진만의 남다른 솜씨 때문에 ‘이렇다 할’ 격정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균율 연습》에 갈등이나 사건이 없다고 하기보다는 갈등과 사건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득해지면서도 하염없이 빠져들게 하는 김유진 소설의 독특함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206쪽)’라고 시작해 여남은 줄 이어가는 문장 속에서 김유진은 ‘평범한’이라는 말을 네 차례나 더 반복한다. 《평균율 연습》에 ‘이렇다 할’ 굴곡이 없어 보인다는 점을 김유진 스스로 고백하여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가 평범한 존재이기에 많은 고통을 견디고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쪽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범에 속하는 의지 항목이 아닐까 싶지만 김유진은 거듭 ‘평범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그가 사용하는 평범은 아무래도 ‘이렇다 할’ 평범은 아닌 것 같다.

평범이라는 말도 그렇거니와, 정의와 자유라는 말은 물론 삶과 사랑과 이별 등의 말조차 더는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오염되었거나 변질되었다기보다는 말에 대한 지나친 수사와 자의적 의미 규정의 기세가 갈수록 드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 하나하나에 화려하거나 폭압적인 은유적 비범함을 장착하지 않고서는 말을 꺼낼 수도 전달할 수도 공감을 이끌어낼 수도 없는 세태로 치닫고 있으니까.

평범함을 평범하게 쓰지 못하여 너나없이 과장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평범함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언어가 그 체계의 특성상 어찌할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와 드라마 또한 산업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언어를 다루고 언어에 의해 다루어지는 문학마저 이를 좇게 된다면 평범한 삶과 사랑과 이별은 어디에서 만나 볼 수 있을까.

그러니 말 그대로의 평범의 추구란 일종의 혁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갈수록 화려하고 드세지는 은유에 대한 쉽지 않은 저항일 테니까. 점증하는 과장된 비유들이 평범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평범은 그러한 과장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평균율 연습》은 그렇게 복원된 놀라운 평범으로 읽힌다. 오래 잊고 있었던 원형의 오롯한 귀환인 듯 반갑고 개운하다. 꾸미고 빗대는 추세에 저항하며 이끌어 올린 ‘평범’치 않은 평범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의 세부에 녹아 있다. 그리하여 《평균율 연습》은 마침내 우리를 눈부신 평범한 삶 앞에 데려다 놓는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한 방울의 내가

문학적 순혈주의는 습작기의 작가들이 전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경외심을 가지고 읽고 그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이어진다. 유전자가 옮겨가는 과정에서 심화와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일화와 협소화도 불가피한 현상이다. 확장에 대한 억제와 긴장 부재는 근친교배의 원치 않는 효과이다. 그럴 때 문학의 자장 밖에서 용병처럼 뛰어 들어와 활력을 불어넣은 이들이 있어 왔고, 그들에 의해 문학은 시대의 기운을 흡수하며 확장되어 왔다. 현호정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문학의 자장 안에서만 사유하고 영향받던 이들은 할 수 없는 상상력과 시대의 기운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 문학적 자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외부 요소들이 글쓰기에 동원된다. 익숙한 이슈에 대해 다른 접근이 가능한 것은 그가 가진 다른 요소들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영혼이나 정신, 신에 대해 쓰고, 기억과 사랑에 대해 쓴다. 익숙한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읽히는 것은 다르게 쓰기 때문이다. 다르기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문장이 아니라 다른 접근이라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는 문장을 쓴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쓰는 것 같다. 어떤 작가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 곧 문장을 쓰는 것과 동일어이지만, 그래서 때로 문장이 글의 주인이 되어 버리기도 하지만, 그에게 문장은 말 그대로 그냥 도구, 이야기와 이미지의 효용을 위한 충실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그는 문장을 섬기지 않고 다룬다. 그래서 때로 문장은 덜 다듬어진 채 불려 나온다.

이 전위적인 작가가 구사하는 방식이 신화의 현대적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라는 건 무엇보다 흥미롭다. 소설 곳곳에 여러 고대 신화의 파편들이 현대적으로 변용되어 등장한다. 그의 모든 소설에는 시공간적 배경이 없거나 희미한데, 그것은 그의 소설적 관심이 한 사회나 시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에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설화적 서술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 아마 그에게 오래된 신화를 현대어로 번역하게 했을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 그의 소설은 가장 오래된 신화의 옷을 고쳐 입은 것이다. 신화가 그런 것처럼 그의 소설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이생과 내세를 오가고 우주까지 높아졌다가 심해까지 깊어진다. 그러면서 사람살이를 노래하고 사람됨을 교훈한다.

너는 언젠가의 나이고, 나는 언젠가의 너라는 이 생각이 그의 모든 소설에 수액처럼 흐른다.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 생각은, 재난과 종말 상황을 배경으로 자생체와 기생체의 생명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는 소설 「물결치는 몸 떠다니는 혼」에서도 여실하다. 무엇보다 최초의 기억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그 존재에 닿기 위해 자기 몸을 바꿔 ‘하강’하는 물방울은 독자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그것은 우주적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 때문이기도 하고 사랑의 신비에 대한 감정적 반응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는 우주만큼 확장되지만 수증기가 되어 하강하기도 한다. 현호정의 소설들은 존재론이 윤리와 구분되지 않는 어느 지점을 지키고 있다.

의기소침해진 문학의 자장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 낯선 유전인자에 의해 얻어질 활력을 기대하는 마음이 이 작가를 주목하게 한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평균율 연습

인생을 조율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그러하겠으나, 또 실은 불가능한 일일 테다. 이쪽 음을 맞추면 저쪽 음이 어긋나는 게 바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일 테니.

김유진의 소설 ‘평균율 연습’은 피아노 조율사의 이야기다. 연주하는 게 아니라 조율하는 사람. 소설은 조율하는 손길만큼이나 섬세하다. 이렇게 섬세하고 이렇게 조율이 잘되어 있으면 독자들은 어디에서 숨을 쉬나 할 만큼. 그러나 좋은 소설은 그런 완벽한 균형 속에서 뜻밖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 한 음 한 음 완벽하게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뜻밖의 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 그건 깨달음도 아니고, ‘새로운 가능성’도 아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수민은 이제 자신에게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아름답게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평균율은 순정률을 보완하기 위한 계책이다. 순정률은 각각의 화음이 절대적인, 변치 않는 비율을 갖는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만든 방식이다. 이 순정률을 대입해 징검다리 식으로 음을 조율하다 보면 열한 개의 소리는 완벽할지 몰라도 마지막 음은 귀에 거북할 만큼 본래 소리에서 크게 어긋나게 된다. 이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일반인의 귀에는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방식이 바로 평균율이다.”

김유진의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삶의 음계를 조절하는 소설. 나눠 갖거나 연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분절인, 그대로 절멸인 순간들을 차곡차곡 쫓아가다가 마침내 평균율에 이르게 하는 것. 제목만큼이나 이 소설은 문장도, 등장인물도, 묘사도 다 완벽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역시 소설의 제목만큼이나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찾게 되는 것은 그 완벽함 속에서 빛나는 결함들, 파괴들일 것이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데, 절멸하는 것들. 고요히 절멸하는 것들.

오랜만에 이토록 잘 조율된 소설을 만났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한 방울의 내가

현호정의 소설들은 낯설다. 포스트휴먼적 환상성이라고 할까. 인간뿐만 아니라 식물이나 물방울 같은 비(非)인간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버젓이 등장하며, 인간과 비인간이 종(種)의 구별을 넘어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공생 관계를 맺기도 한다. 현호정의 소설들은 친절하지도 않다. 두 장의 흰 빵 사이에 연필을 끼워 먹는 상황이 펼쳐져도, 화초가 말을 하고 인간의 생리혈을 요구하는 상황이 펼쳐져도,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나 설명이 주어지질 않는다. 신화적 기원이나 동물적 기원을 지닌 주인공들이 21세기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아서, 신화적 시간이나 동식물의 시간 그리고 특정하기 어려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한꺼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현호정의 소설에서 사회적·현실적 맥락이 흐릿하게 제시되는 것은, 주인공들이 사회현실의 논리에 편입되거나 관련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현실의 논리나 모습은, 사회와의 관련성을 거부하는 주인공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음식에 대한 태도는 현호정 소설에 드리워진 사회현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라즈베리 부루」에서 여주인공이 화초인 부루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에게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였고, 부루가 가져온 음식을 여주인공이 먹은 이유는 그 음식들이 “누군가 먹다 남긴” 쓰레기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냥”으로 대변되는 사회현실의 논리를 거부하고 “우리는 여기에 갇힌 자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현호정의 소설에서 음식이 사회현실의 논리를 대변한다면, 사회현실의 논리는 폭력과 포식으로 대변되며, 등장인물들은 폭력과 포식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조금 편하게 말하자면, 사회현실은 주인공들에게 힘을 합치고 덩치를 키워 다른 생명체들을 잡아먹자고 했고,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현실의 후미진 모퉁이에서 폭력과 포식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고 버티며 살아왔던 것이다. 「라즈베리 부루」에서 화초인 부루는 여주인공에게 생리혈을 요구한다. 부루는 생리혈을 희석한 물을 먹었고,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이 되었다. 화분에서 벗어났고 집 바깥으로 나가 버려진 음식을 가져와 여주인공을 먹이기도 했다. 여주인공은 한동안 생리가 멈추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생리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빈사상태에 빠진 여주인공을 열매처럼 품고 부루는 노래를 부른다. 여주인공은 생리혈로 부루를 키웠고, 부루는 그녀에게 무덤이자 자궁이 되어 준 셈이다.

그렇다면 생리혈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리혈은 상처·질병 혹은 피를 흘리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언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피(잭 파커, ‘우리의 새빨간 비밀’, 253면)이다. 폭력과 포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유일한 피, 또는 폭력과 포식의 논리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폭력과 포식의 논리를 반복하지 않고, 사회현실의 폭력과 포식의 논리를 더 강력한 폭력과 포식으로 맞서지도 않고, 폭력도 아니고 포식도 아닌 그 어떤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요청이, 생리혈을 먹는 화초라는 환상적인 장면 속으로 응축된 것이리라. 문학상 심사를 위해 생리혈을 마시는 화초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