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인기를 끈 웨이브 드라마 ‘약한 영웅’이 넷플릭스로 플랫폼을 옮겨 이례적인 역주행 중이다. 지난달 26일 공개 직후 넷플릭스 TV 부문 글로벌 차트 3위까지 올랐고, 한국 콘텐츠가 강세인 아시아·남미뿐 아니라 미국(5위)·프랑스(3위) 등 북미·유럽 국가의 톱 10 차트까지 진입했다. 웨이브가 경영난 등으로 콘텐츠 투자를 축소해 제작사는 웨이브와 논의 끝에 넷플릭스에서 시즌 2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달 시즌 2 공개를 앞두고 넷플릭스는 시즌 1을 먼저 공개해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네이버 웹툰이 원작인 ‘약한 영웅’은 왜소한 체격의 모범생 연시은이 친구를 지키려고 학교 폭력에 맞서는 이야기. 겉보기엔 약해 보이지만 명석한 두뇌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며 카타르시스를 준다. 아이돌 출신인 박지훈 외에도 최현욱·홍경 등 연기 잘하는 신인 배우를 대거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글로벌 콘텐츠 평점 사이트 IMDb에서도 8.5점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주연들의 연기력이 시리즈를 이끌었다. 하나같이 놀랍고 가슴 아픈 연기를 선보였다” 등의 평이 달렸다.
‘약한 영웅’의 넷플릭스 이적은 대표 콘텐츠마저 지키지 못한 토종 OTT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송 광고 시장이 위축되고, 제작비 상승으로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넷플릭스 쏠림’ 현상은 가속하고 있다. JTBC 추리 예능이었던 ‘크라임씬’은 지난해 티빙에서 ‘크라임씬 리턴즈’로 7년 만에 부활하더니 올해엔 ‘크라임씬 제로’로 넷플릭스에서 신규 시즌을 공개한다. KBS 예능 ‘홍김동전’도 저조한 시청률로 폐지되고 넷플릭스에서 시즌 2 격인 ‘도라이버’를 내놨다. 지난해 지상파 3사와 웨이브의 콘텐츠 독점 계약이 종료되면서 SBS도 넷플릭스와 6년간 콘텐츠 공급 계약을 맺었다.
업계에서는 국내 제작사들의 넷플릭스 종속이 심화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26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방송 시장 경쟁 상황 평가’에 따르면, 2023년 국내 방송사와 OTT가 편성·공급한 오리지널 드라마는 총 90개로 전년(115개) 대비 약 21.7% 줄었다. 같은 기간 해외 OTT의 한국 작품 수는 2022년 21개에서 2023년 30개로 증가했다. 이상원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글로벌 플랫폼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져왔지만, 지난해 방송 광고 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업계가 충격에 빠졌다”면서 “돈을 벌지 못하니 콘텐츠에 투자하기 어렵고 넷플릭스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글로벌 플랫폼 종속이 시작됐다고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약한 영웅’의 경우, 국내 OTT에서 출발해 글로벌 시장까지 진출한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글로벌 OTT와 자본력으로 맞붙기 어렵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서 잘 키운 콘텐츠를 팔고 재투자하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영신 미디어 산업 평론가는 “과거 방송사가 드라마 종영 후 글로벌 판권을 팔았듯이 제작사 입장에선 국내 OTT에서 먼저 돈을 벌고 글로벌 OTT와 방영권 계약으로 추가 수익을 낸 것”이라면서 “양질의 콘텐츠가 국내 OTT를 거쳐서 글로벌 OTT로 넘어가는 구조가 정립되면 모든 콘텐츠가 넷플릭스로 직행하는 것보다 생태계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