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남신 작가가 경기도 곤지암 작업실에서 회화 ‘바라보기’ 앞에 앉아 있다./박성원 기자

삐딱한 것 같지만 유머가 있고, 웃음 뒤에 페이소스(pathos·애수)가 배어있다. 서양화가 곽남신(72)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단색화가 시대를 평정할 때 반기를 들었고, 민중미술도 극사실주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제 길을 팠다. 그래서 찾은 ‘그림자’ 작업을 확장해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성찰해 온 그가 올해 37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작업실에 찾아갔을 땐 이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15년간 집과 화실을 겸하던 곳을 정리하고 서울로 옮길 작정이라고 했다. 대형 탁자 위에는 검은 실루엣이나 간결한 윤곽선으로 그린 갖가지 인간 군상들이 펼쳐져 있었다. 종이나 금속 판을 오려내 실루엣이나 그림자 형상을 만들고, 그것들을 그림으로 재조립해 작품을 만든다. 수상 소감을 묻자 그는 “좋은 작가가 많은데 늙은이한테 상을 줘서 무슨 소용 있나 싶다”면서도 “제 나름대로 평생 작업을 해왔는데 주목해 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싶어 기쁘다”고 했다.

곽남신, '네, 알겠습니다(Okay, I got it)'. 91x7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3. /작가 제공

홍익대 서양화과에서 그림을 배웠다.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이 스승이다. 단색화가 동양 정신과 결합해 시대를 장악하던 때였다. “평면이나 물성, 모더니즘적 사고가 유행했고,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만 지속되는 데에는 불만이 있었다. 그분들이 하신 게 수행과 반복인데, 결국 정신성은 사라지고 상품으로서만 가치가 남지 않겠나 싶었다.” 그때 민중미술이 태동했고, 그게 싫은 친구들은 극사실주의로 갔다. 곽남신은 “현실 고발은 신문 만평도 한다. 민중미술이 과연 만평보다 더 예술적인 향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프로파간다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을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나.”

곽남신, ‘동근이상(Same roots, different look)’. 117x91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3. /작가 제공
곽남신, '친구1(Mate)'. 91x73cm, 캔버스에 돌가루, 아크릴릭, 2024. /작가 제공

1979년 마른 꽃의 그림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때부터 그림자는 그가 지속적으로 주목해 온 소재이자 주제다. 존재의 흔적인 그림자를 전면으로 끄집어내 실체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해 환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프랑스로 유학해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했고, 귀국 후 모교 미대 교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를 지냈다. 2018년 정년 후엔 전업 작가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은퇴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작가로서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나 자신과 이렇게 치열하게 놀아본 적 있었나 싶더라”고 했다.

초기작에선 미풍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형상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림자는 나무의 실체를 반영하면서도 존재를 갖지 않는다. 최근엔 인물을 더 많이 다룬다. 실체 대신 윤곽선만으로 표현하거나, 검게 처리한 인물 이미지는 관객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림자가 그것이 드리워진 평면에 놓인 철사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하드보드지 실루엣 형상이 자신이 오려져 나온 판지를 바라보기도 한다”며 “어쩌면 초현실적일 수 있는 이런 이미지를 따르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이 부조리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고 했다.

곽남신, '시간이 머무는 곳'. 캔버스에 아크릴릭, 색연필, 150x260cm, 2023. /작가 제공

평론가 김원방은 그에 대해 “예술이 더 작고 겸손하며 피부에 와 닿는 재미, 진실한 아름다움을 지니는 활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라고 했다. 스스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냐고 묻자 그는 “시류에 따르지 않은 작가”라고 답했다. 요즘 흔히 다루는 양극화나 기후 변화, 인종 차별 같은 거대 담론에도 염증을 느낀다. 그는 “거대 담론을 자기 작품에 이용하면 금방 주목받을 수 있겠지만, 대개는 그걸 자기 작품을 위한 과시로 이용한다. 절실하게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서 작품에 쓴다면 그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화가 곽남신(72)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서양화과,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88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를 지냈다. 회화, 판화, 드로잉, 조각, 네온,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조형언어를 실험해왔다. 그림자와 실루엣을 통해 인간 내면을 파고든다.

곽남신 작가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실루엣 형상이 가득한 경기도 곤지암 작업실에 서 있다. /박성원 기자

[심사평] 거대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보편적 휴머니즘’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1954년 6월쯤 이중섭이 쓴 글이다. 제국의 패권주의와 동족상잔의 전화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이중섭의 가슴에는 세계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외침이 있었다.

1954년 7월 30일 원산의 선배 정치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절반은 살아온 우리들이 (중략) 나머지 절반은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사람으로서 하는 지고의 일이 예술 아니던가. 이중섭에게서 풍기는 이러한 고졸한 향취, 한 세기의 활력과 슬픔이 농축된 보편적 휴머니즘의 자태를 곽남신이 걸어온 예술에서도 만난다.

곽남신의 예술이 걸어온 행보는 요란하지 않고 품위가 있다. 당대를 주도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근엄주의와 형식주의에 눌리거나 치우치지 않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후기’나 ‘해체’ 운운하는 담론에 편승하지도 않았다. 예술적 보수거나 진보, 글로벌주의나 지역주의의 어느 한쪽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양자 모두에서 신기루를 좇는 헛헛함을 경험하면서, 곽남신은 그만의 대안적 경작지를 찾아 나섰다.

부조리, 위선, 엉터리 신화를 찌르는 뾰족함을 잃지 않았다. 무겁지 않지만 진지하고, 선언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지만 메시지와 진정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 점에서 다시 이중섭과 교차한다. 민족은 문화적인 기억이 없다면 병들게 된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의 길을 기억하는 일의 의미다. 그래서 이중섭의 길은 우리에게로 가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 길에서 곽남신과 마주하는 일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제37회 이중섭 미술상 심사위원회 김인혜·류철하·서성록·심상용·정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