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조 교수는 하와이 사탕수수노동자 이민 2세다. 1906년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레온, 테플론 개발에 참여했고, 불소화학 불모지인 한국이 국산 프레온을 개발하는 작업을 도왔다.하와이 이민2세 중 가장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중 하나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작년 12월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박달조(1906~1988)박사는 하와이 이민선을 타고 사탕수수 노동자로 건너간 한인 이민 2세다. 20~30대 젊은 연구자 때 냉장고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과 테플론을 공동개발하고, 미국화학회 불소화학회장을 지낸 세계적 연구자다.

그는 1970년대 유기화학 불모지인 한국에 국산 프레온 개발을 위해 기술을 전수해줬고,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2대 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과학계에서조차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이민선을 탄 한인2세가 어떻게 세계적 학자로 성장하고 고국에 돌아와 산업화와 ‘과학 한국’ 건설에 기여하게 됐을까. 120년 전으로 돌아간다.

◇1904년 부산서 도릭號로 하와이행

대구 출신 박윤옥은 1904년 7월 부산에서 도릭호(號)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하는 이민자였다. 하와이에서 이 바바라와 결혼한 박윤옥은 1906년 큰 아들 박달조(미국명 조셉 박)를 낳았다. 박달조는 1925년 호놀룰루의 가톨릭계 세인트루이스 학교를 졸업했다. 학비가 싼 가톨릭계 학교였다. 이어 오하이오주 데이턴(University of Dayton)대에 진학했는데, 역시 학비가 저렴한 가톨릭계였다.

1972년 3월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원장으로 부임한 박달조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하와이 이민노동자 2세로 태어난 박 원장은 프레온, 테플론 개발에 참여하고 미국화학회 불소분과위원장을 지낸 세계적 석학이다.

◇권투, 웅변 실력 뛰어나

박달조는 재학 시절 내내 최상위 성적을 받았다. 권투로 체력을 다지고, 웅변에도 뛰어나 전미학생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미국 대통령(John Calvin Coolidge Jr.)상패를 받기도 했다. 졸업 직후인 1929년 프리지데어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있는 냉장고 전문업체로 1918년 GM이 인수한 곳이다.

박달조는 토머스 미즐리 지휘아래 냉장고용 냉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프레온가스로 알려진 염화불화탄소를 처음 개발한 게 이 연구팀이었다. 미즐리는 1930년 미국화학회에서 프레온을 가득 들여마신 다음, 촛불에 내뿜어 꺼뜨리는 시연(試演)으로 화제를 모았다. 프레온이 유해하지 않고, 불을 꺼뜨리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프레온은 ‘기적의 가스’로 불리며 가정용 냉장고의 대대적 보급에 기여했다.

박달조 한국과학원장은 취임 인터뷰에서 산업과 연결되는 과학기술연구를 강조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불소화학 산업에 씨앗을 뿌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기적의 가스’ 프레온 상품화 개발

박달조는 프레온을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기 위해 개발, 생산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냉장고, 에어컨, 아이스크림 제조기는 물론 면도크림용 에어로졸에도 프레온을 활용했는데, 이 연구의 초기 공동개발자로 참여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특허권자로 이름을 올리진 못했는데, 당시 특허 개발자는 3명 이내로 핵심 연구자만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1933년 박달조가 오하이오 주립대 화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은 이런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4년뒤인 1937년 ‘아라비노스 아세테이트의 광학 회전과 이성질체의 상관관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태규에 이어 조선인으로는 두번째 화학 박사였다.

◇조선인 두번째 화학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듀폰의 잭슨 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가 10년간 에어로졸 추진체와 주방용품으로 사용되는 코팅제 테플론을 개발했다. 1941년 특정 불소화합물 제조방법에 관한 ‘불소화합물’을 첫 특허로 출원했다. 그는 35건의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1947년 콜로라도대 교수로 옮긴 그는 유기불소화학훈련센터를 설립, 미국 최대 규모로 성장시켰다. 유기불소화학 분야에서 박사 115명, 석사 24명을 배출하고 130편 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교육,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화학회 불소분과위원장(1967~1968)을 맡아 이 분야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산업과 동떨어진 연구대신 산학(産學)협력의 길을 추구했다. 듀폰을 비롯, 세계 20여개 기업의 연구고문으로 활동했고,콜로라도 화학품 제조공장 부사장을 겸임했다.

◇아내는 한인 이민사 첫 석사논문 쓴 김봉희

그는 콜로라도대 교수로 옮긴 1947년 평안도 출신 교포 2세 김봉희와 결혼했다. 하와이 칼라카우아 예비중학 교사로 재직한 김봉희는 1937년 하와이대서 한인 이민연구로 첫 석사 학위를 받은 연구자다.

◇국산 프레온 ‘코프론-12′개발 지원

콜로라도대 교수 시절인 1964년 7월 내한해 대학, 기업을 시찰하는 한편, 강연했다.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 박달조 박사 귀국, 조선일보 1964년8월5일) 1969년 그는 해외 한국인 과학기술자 유치사업에 따라 내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국산 프레온 개발 연구를 지원했다. 키스트는 그를 기술고문으로 위촉하고 자료를 제공받아 국산 ‘코프론-12’생산에 성공했다.

1972년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2대 원장에 임명됐다 . 취임 인터뷰에서 “외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 시간과 싸워야 한다”며 “실험실에서의 훈련보다 문제를 공격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려한다”(한국과학원장 박달조 박사, 조선일보 1972년3월21일)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말 제대로 못했지만...

그는 한국어를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우리말 해독능력은 30%정도’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했기에 미국적 생활, 사고방식이 몸에 배 후학들을 당황케하기도 했다. 한국을 왕래할 때 비행기 일등석을 고집했다고 한다. 미국 학계에서의 위상이나 듀폰 등 여러 기업 고문을 지냈기에 이런 대우를 당연시했던 것같다. 학계에선 그가 뿌린 씨앗에 기초해 한국의 불소화학 공업이 발전했다고 평가한다.

◇참고자료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북스, 2024

박달조, 공업소유권과 경제개발-특히 각국의 특허법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화학과 공업의 진보 3-3. 1973

안영옥, 박달조 박사님을 추모하면서, 화학과 공업의 진보 29-8, 대한화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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