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장(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무심코 놓치고 지나간 신간, 인터뷰에 담지 않은 후일담, 각종 취재기 등 이모저모. +α를 곁들여 봅니다.


단편 ‘그 개와 혁명’으로 올해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예소연(33) 소설가를 얼마 전 만났습니다.

지난해 8월 첫 소설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이 나왔을 때 부리나케 인터뷰를 하고 문화면에 기사를 썼거든요. 마음 깊숙이 자리한 감정을 남다르게 잘 포착해 쓴다고 느꼈어요. 모나고 비틀리고 축축한 마음마저 끄집어내는 용기에도 감탄했고요.

예소연 소설가 /ⓒ목충헌

종합 일간지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대면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썼었는데요. 그래서 이후 이상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 감식안이 틀리지 않았군’ 하는 자부심이랄지….

예소연 소설가와 저는 92년생 동갑내기인 데다, 알고 보니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사는 이웃사촌이었어요. 그래서 동네 맛집과 걷기 좋은 산책로를 공유하고 ‘다음엔 저녁에 번개 해요~’ 하고 헤어졌거든요. 그 저녁 자리가 지난달 31일 성사되었습니다. 주고받은 이야기를 뉴스레터 구독자들과 나눕니다.


황지윤 기자(이하 황): 지난 인터뷰를 한 뒤로 작품이 많이 나왔어요. 각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작년 12월에 출간된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북다)부터 얘기해볼까요?

예소연 소설가(이하 예): 청소년 하이틴 로맨스를 청탁받았을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 청소년 시절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그런 것을 위주로 그리고 싶었고요. 또 그때 느꼈던 외로움이나 쓸쓸함, 어쩔 수 없이 가해졌던 다양한 폭력들과 거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 같은 것을 소설에 써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북다

황: ‘사랑과 결함’에도 청소년 이야기는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보다는 훨씬 밝은 톤이라 느꼈거든요.

예: ‘사랑과 결함’에 나오는 연작 시리즈 같은 경우엔 청소년기의 어두운 모습에 집중한 게 사실이에요. 그런 모습보다는 그 시절에 느낄 수 있는 한순간의 기쁨 같은 것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다룬 것 같아요.

황: 지난 2월에 나온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 얘기를 해볼까요? 세 친구가 나오는데 이건 어떤 우정일까, 우정인 건 맞죠?

예: 그렇죠. 우정인데, 우리가 계속 유지하고 이어가는 것만 우정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끊어진 우정도 많거든요. 그래도 그 순간을 함께했던 사이라면, 흔적처럼 남은 관계가 있는 거죠. 그런 관계를 솔직하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어떤 우정은 나를 비틀고 바꾸기도 하는, 그런 과정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현대문학

황: 세월호가 이야기에서 큰 축을 차지하죠.

예: 제가 프놈펜에 있었을 때(소설 속 등장인물 둘은 실종된 친구를 찾아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향한다. 세 친구는 대학 시절 봉사 활동을 하며 프놈펜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생중계로 보게 되었고, 그때의 트라우마를 아직 간직하고 있거든요. 거기서부터 출발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집단적 트라우마’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이후에도 참사가 계속해서 반복되었어요. 이 반복되는 참사를 우리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영영 기억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남게 될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리고 사실은 개인적인 상실이 많이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최근에 큰 상실을 겪으면서, 이 상실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갖고 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참사와 관련된 애도를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개인적 상실과 집단적 상실. 애도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황: 프놈펜에 계셨을 때 자전적 경험이 녹아든 건가요?

예: 자전적인 요소는 없고요. 음, 그냥 모티프 정도?

황: 오랜만에 세월호를 직접 호명하는 작품을 본 것 같아요. 작가님과 제가 나이가 같잖아요. 90년대 초중반생들에게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특히 크게 남은 것 같아요. 왜일까요?

예: 제가 어른이 되고 나서 겪은 최초의 사회적 재난이었던 것 같아요. 구조가 되지 않는 상황을 우리가 지켜봐야 했잖아요. 너무 끔찍한 일이었으니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황: 이게 평생 같이 가겠구나. 나는 그것과 같이 가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좀 들기도 해요.

예: 그런데 90년대생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도 해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고요.

황: 저희… 어른인가요?

예: 어른이죠. 재난이나 참사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직시하고, 어떤 행동을 취하려는 태도가 많이 보인다고 생각해요. 외면하지 않고, 견디며. 무언가 됐구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황: 다음 소설 얘기를 해볼까요? 지난달 24일에 출간된 ‘소란한 속삭임’(위즈덤하우스). ‘이 사람이랑은 진짜 소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랑 연대하는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판타지 아닌가? 이게 정말 가능한가? 여쭤보고 싶었어요. (소설은 한데 모이기 어려울 것 같은 여러 사람이 ‘속삭이는 모임’을 꾸려 활동하는 이야기다. 거리 한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수자’씨도 그중 하나다. 그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라며 “너무 주눅이 들어 있는 것도 좋지 않다”며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예: 어렵죠. 현실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죠.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죠. ‘흐린 눈’ 하고 바라보면 다 비슷비슷한 사람인데….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는 생각으로 다가가고 관계 맺을 필요는 없죠. 어렵긴 한데, 실천 가능한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위즈덤하우스

황: ‘수자’라는 캐릭터는 거리에서 만나면 정말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그런 수자의 억척스러운 면이 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작가님이 계속 ‘화해’를 시도하고 있구나. 이 세상의 갈등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구나 싶었어요.

예: 화해보다는 ‘알아차림’에 가까운 것 같아요. 낯선 이와의 관계에서는 그 사람의 일면을 알아차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인데 싸우고 화해할 일은 없잖아요. 싸우면 큰일 나요. 길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는 사람도 집에 가면 밥을 먹고, TV를 보고, 설거지를 하겠죠. 그런 걸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알아차림이 되게 재밌고, 소설 쓰기가 그래서 참 좋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 그 사람의 그런 면을 알 수 있거든요.

황: ‘세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문제. 그것은 우리가 포함된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문장이 소설 말미에 나오잖아요. 뜨끔했어요.

예: 예전에 저는 세상이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세상은 참 이상하게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이제 좀 바뀌었어요. 이 나이쯤 되면 우리가 잘못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하고, 우리가 뭔가 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잘못된 세상에 우리가 포함돼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가. 더 무서운 건 우리가 곧 기성이 된다는 거…. 10년쯤 지나면 다음 세대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있고…. 그런 거 생각하면 참 신기해요. 세대가 바뀌고 그 속에서 우리 위치가 움직이잖아요.

/다산북스

황: 자연스럽게 ‘그 개와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는데. 심사평에 “지금 이 시대의 질문에 응하는, 가히 혁명적인 포용의 서사”라는 멋진 표현이 있었죠. (소설은 86세대 운동권 아빠와 딸의 관계를 다룬다. 화자인 ‘나’는 아빠의 마지막 지령에 따라 장례식장에 개 ‘유자’를 데려오고, 유자는 강아지답게 장례식장을 ‘개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예: 사실 저는 그렇게 혁명적인 포용의 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요(웃음). 이미 다 이야기했지만, 당시 아빠 간병을 하고 있었던 터라서…. 그전부터 아빠와 세대론적 갈등에 항상 직면했던 것 같아요. 아빠를 보면서 ‘왜 저러지?’ 하기도 하고, 아빠도 나한테 ‘왜 저러지?’ 하고. 서로 그랬어요. 저는 진짜 아빠를 존경했거든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왜 저렇게 이치에 안 맞는 말을 할까? 그런 궁금증에서 소설이 출발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세대의 지문 같은 흔적을 지우고, 그런 것조차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내가 어떤 가치를 논하고 어떤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어요.

이런 생각을 요목조목 하다 보니까 결론은, 그냥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해하다 보면 빗장이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빗장이 풀리면 알아가기 위한 길이 생긴다. 진짜로 마음을 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면서 그게 알아감의 새로운 뜻이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근데 소설을 쓸 때 이런 생각을 막 엄청 하진 않았어요(웃음). 당시에 생각한 건 진정성이었어요. 왜 젊은 사람들은 노동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왜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의 가치를 훼손할까. 그 대립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고요. 그리고 강아지, 비인간 동물이 장례식에 와야 한다. 이 정도. 이 팽팽한 대립을 완전하게 훼방 놓고 망가뜨릴 존재는 반드시 비인간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날 만남에서 언급하지 못한 소설도 있습니다.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자선 대표작 단편 ‘마음 깊은 숨’입니다.

왜 언급하지 않았냐면... 미처 읽지 못하고 예소연 소설가를 만났거든요. 그를 만나고 며칠 뒤 이 단편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서 밀도 높은 상실감을 길어 올리는 작품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겪은 큰 상실은 저에게 주어진 무늬예요. 상실을 극복하거나 잊고 싶지 않아요. 기억을 어떻게 붙들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다음 소설을 쓰고 있어요.” 그가 작년 여름 인터뷰 때 했던 말입니다. 그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단편이었어요.

예소연 소설가 왈, 앞으로 써야 할 글이 많다고 하네요. 작가는 괴로울 수도 있겠으나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고대하는 중입니다.

이야기(story)에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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