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청춘 영화에선 학원 가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다. 땡땡이를 치려고 재즈의 세계에 입문하거나, 집에 처박혀 종일 만화를 그리는 대책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쓸모를 따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청춘의 특권. 방황하고 허비하는 시간마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고자극’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무해한 일본 청춘 영화들이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CGV는 ‘월간 재개봉’ 기획전으로 지난달 말 음악 영화 ‘스윙걸즈’를 20년 만에 재개봉했다. 여름방학을 맞은 시골 학교, 보충 수업을 듣는 낙제생 13명이 얼떨결에 재즈 밴드를 결성한다. 악기 소리도 제대로 낼 줄 몰랐던 학생들이 조금씩 박자를 맞춰가며 음악을 완성해 가는 성장 영화. 완벽하지 않아도, 엇박자를 타도 멋스러운 ‘스윙’ 리듬으로 정박에 맞춰 사느라 피곤한 어른들을 위로한다. 전정현 CGV 콘텐츠편성팀장은 “자극적인 전개보다 소소한 이야기나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는 일본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관객이 늘고 있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과 더불어 ‘성장’이라는 주제가 특히 10대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했다.
롯데시네마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9일 재개봉한다. 2017년 국내 개봉 당시 46만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고, 원작 소설도 30만부 팔리는 등 ‘췌장’ 신드롬을 일으켰다. 기괴한 제목과 달리 벚꽃이 만개한 봄, 학교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첫사랑 로맨스. 책에만 빠져 살던 외톨이 남학생이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이 췌장암에 걸린 시한부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친구의 ‘버킷 리스트’를 함께 이뤄나간다. 김세환 롯데컬처웍스 엑스콘 팀장은 “8년 전 개봉했을 때도 청소년 관객 비율이 컸기 때문에,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한 요즘 10대 관객에게 또 한번 소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면서 “트렌디한 배우가 나오면서 눈물샘을 건드리는 일본 로맨스 콘텐츠가 요즘 젊은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최근까지 장기 상영하며 30만 관객을 모은 애니메이션 ‘룩백’은 교지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하는 두 소녀가 주인공. 서로 질투하고, 동경하고, 연대하며 만화가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뭉클하게 그려 호평을 받았다. 한국에는 입시 경쟁, 학교 폭력 등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학원물이 많다면, 일본 학원물은 다양한 소재가 강점이다. 대다수가 학업에 매진하는 한국에 비해 다채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에노모토 야스타카씨는 “일본에선 학원에 가는 학생이 소수고, 보통은 학교가 끝나면 스포츠·음악·미술 등 클럽 활동에 참여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어서, 저마다 학창 시절에 대한 추억이 많은 편이라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국내에선 OTT를 중심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 학원물이 늘고 있다. 폭력, 마약, 도박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며 경쟁하듯 수위를 높여왔다. 사라진 한국 청춘 영화의 자리를 일본·대만 영화가 메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해 국내 흥행 30위 영화의 캐릭터 연령대를 분석한 결과, 주요 캐릭터 54명 중 10대는 2명(3.7%)뿐이었다. 코로나 이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20~30대에서 30~40대로, 남성 캐릭터는 30~40대에서 40~50대로 평균 연령대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