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조선에 낭보’
1937년 3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조선지부가 송도고보 교사 석주명에게 조선산(産) 나비총목록을 집필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824년 설립된 왕립아시아학회는 세계적 권위의 아시아 연구단체로 1900년 서울서 외교관, 선교사, 교사 등이 중심이 돼 조선지부가 출범했다. 이 학회에서 당시 스물아홉살인 교사 석주명에게 조선 나비를 총망라한 영문 논문을 기관지에 집필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조선 자연과학의 세계적 진출’로 반기면서 ‘새벽 하늘에 별같이 드문 우리 조선 곤충학자중 석씨의 이번 혜성적 출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영국왕립협회 기관지에 조선산접류 소개, 조선일보 1937년3월27일)고 소개했다.
석주명은 “한달에 한번 머리깎으러 세상밖을 나다니는 외에는 연구실 문을 떠난 일이 없다”고 인터뷰할 만큼 연구밖에 모르는 괴짜였다. 1930년대 후반 가장 유명한 조선인 과학자 축에 들었지만, 과학계와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스승이자 선배인 조류학자 원병오와 같은 곤충학자인 조복성 정도와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유로운 시간과 윤택한 경비, 꾸준한 정진 노력’을 연구 비결로 꼽았다.
◇‘인도 까마귀’ 별명
평양 출신인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가장 큰 요릿집(우춘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넉넉한 가정형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해 개, 고양이는 물론 비둘기 개구리 도마뱀을 잡아 집에서 길렀다고 한다.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1922년 동맹휴학에 가담했다가 학교를 중퇴했다. 개성 송도고보로 옮겨 졸업한 후, 1926년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로 유학갔다. 여기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에게 지도를 받으며 곤충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9년 졸업 후 함흥영생고보를 거쳐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부임했다. 석주명은 이 때부터 나비 연구에 몰두했다. 송도고보엔 스승이자 전임 박물교사였던 원홍구가 갖춰놓은 동식물, 특히 조류(鳥類) 표본이 있었다.
석주명은 1930년대초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75만점 가까운 나비 표본을 수집했다. 여름에는 얼굴이 타서 ‘인도 까마귀’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숙제로 나비 200마리씩 채집해오라는 과제를 내고 연구에 활용했다. 전국서 온 학생들은 저마다 자기 고향에 서식하는 나비를 채집해왔다. ‘나비 박사’ 석주명의 출발이었다.
◇전국서 나비 표본 75만점 수집
석주명은 1933년 조선박물학회지에 첫 단독논문을 발표했다. 개성에 서식하는 나비 120종(아종 포함)의 명칭과 관찰 시기를 정리한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였다. 이에 앞서 가고시마고농 선배이자 평북 구장 보통학교 교장인 다카쓰카와 공동으로 ‘조선 구장지방산 접류 목록’을 발표했다. 1934년 ‘조선산 접류의 연구(제1보)’를 시작으로 개체변이를 파헤쳤다. 해외 학자들이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는 것에 의문을 갖고, 실제론 다른 종이 아니라 기존 종의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수많은 나비를 관찰한 풍부한 현장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
◇1939년 영문 ‘조선산접류총목록’출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 요청으로 영어로 쓴 ‘조선산 접류(蝶類) 총목록’(1939)은 뉴욕에서 인쇄돼 경성에서 출간됐다. 430쪽짜리 이 책엔 조선산 나비 255종이 정리됐다. 이 책은 일제시대 조선인 연구자가 과학분야에서 영문으로 펴내 세계적으로 소개된 유일한 연구서였다. ‘나비 박사’란 호칭도 이 책 출간으로 얻은 명성이었다.
1938년 일본학술진흥회의 장기 연구비 지원을 받은 것도 유명세에 도움이 됐다. 조선인 과학자로 이 연구비 지원을 받은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공인한 세계적 과학자라는 인상이 컸던 듯하다. (나비학자 석주명씨, 국고에서 연구비 지급을 결정, 조선일보 1938년11월19일)
1939년부터 변이 연구 논문 뒤에 나비 분포 지도를 덧붙이는 식으로 나비 분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73년 유고(遺稿)로 간행된 ‘한국산 접류 분포도’엔 한국산 나비 250종 마다 그와 제자들이 해당 종을 채집한 한국 지도와 그가 해외 과학자들과 표본, 학술 자료를 교환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당 나비가 발견된 지역을 표시한 세계지도가 한장씩 수록돼있다.
◇한국산 나비 248종의 우리말 이름 정리
석주명은 1942년 송도중학교를 사직하고,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1941년 생약연구소는 제주도시험장을 개설했는데, 석주명은 제주도에 내려갔다. 제주도까지 나비 분포연구를 확대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주명은 1945년 5월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부장으로 옮겼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해 9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으로 일했다.
석주명은 나비의 우리말 이름 짓기에 앞장서 한국산 나비 248종의 우리말 이름을 정리해 1947년 조선생물학회에서 통과시켰다. 각시멧노랑나비, 수풀알락팔랑나비처럼 나비의 특징과 모습을 포착한 감각적이고 예쁜 이름이 많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나비 이름의 3분의2이상은 석주명표 이름이라고 한다.
◇‘제주학’의 개척자
석주명은 ‘제주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나비 채집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 사투리나 문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제주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2년간 일한 데 이어 1948년 다시 제주도를 방문, 사투리와 곤충상 등 제주의 인문, 자연실태를 조사,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등 6권의 제주도 총서를 출간했다. 1947년 총서 첫권으로 나온 ‘제주도 방언집’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방언집으로 국어학계에서 자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역작이다.
◇어처구니없는 최후
석주명의 최후는 어처구니없다. 6.25 당시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10여 년 넘게 걸린 ‘한국산 접류 분포도’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많은 나비 표본과 연구 자료때문에라도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9.28 수복까지 무사히 넘긴 그는 10월6일 그의 직장인 과학박물관이 불에타 재건회의에 참석하러 나가다 충무로 4가 근처 개울가에서 군복 입은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다. 낮술로 불콰해진 일당들이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석주명에 ‘빨갱이’라며 갑자기 총을 겨눴다.‘나비학자’라고 신분을 밝혔으나 총이 발사됐다. 마흔 둘 한창 나이의 나비박사는 이렇게 세상을 떴다. 그를 쏜 사람들의 정체나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전쟁이 빚어낸 야만의 시대였다.
◇여동생 석주선의 노력으로 부활
‘나비 박사’ 석주명의 부활은 전적으로 세살 아래 여동생 석주선(1911~1996)의 역할이 컸다. 1950년 10월 오빠가 타계한 후 ‘오라버니의 유고 정리는 내가 살아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었다’ (나비학자 석주명 유고집 완성, 조선일보 1992년 5월15일)고 말할 정도였다. 석주선은 1.4후퇴때 키만한 배낭에 오빠의 유고(遺稿)를 챙겨 부산으로 내려갔다. “책으로 나오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일년에 두번씩 봄, 가을로 원고 거풍을 했는데 아무도 없는 일요일날 혼자서 했지요. 그러지 않으면 큰 일날 것같고 혹시 한장이라도 잃어버리면 지하에 가서 그 분을 만나뵐 수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나비학자 석주명 유고집 완성)
대표작 ‘한국산 접류 분포도’(1973)를 비롯한 석주명의 저작은 동생이 귀중히 간수한 원고덕분에 세상과 만났다. ‘제주도 수필’(1968), ‘제주도 곤충상’(1970), ‘제주도 자료집’(1971)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1992) 등이다. 석주선은 한국복식사연구의 권위자로 서울여대, 단국대에서 가르쳤다. 단국대 죽전캠퍼스엔 그가 기증한 복식유물 3365점을 토대로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설립됐다.
정부는 1964년 석주명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1998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2008년엔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뽑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참고자료
석주명,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 신양사, 1992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북스, 2024
석주명, 개성 지방의 蝶類, 조선박물학회지 15, 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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