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Karma). ‘업보’를 뜻한다. 몇 해 전, 한국 미술의 전통과 현대를 주제로 기획한 ‘DNA: 한국 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에는 ‘카르마’란 제목의 작품이 세 점이나 소개됐다. 작가는 모두 달랐다. 대체 카르마가 뭐길래.
이 전시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 작품은 서도호의 설치 조각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로비 한가운데, 2층 바닥부터 3층 천장까지 닿도록 높이 쌓은 인물 군상. 앞으로 걸어가려는 사람의 어깨 위로 또 다른 이들이 올라탄 구조다. 아래 사람의 눈은 위 사람의 손에 가렸다. ‘나’라는 존재를 이루기까지 거쳐 온 앞선 이들의 축적된 시간과 업보를 암시한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인과의 사슬이자 업의 형상이다.
또 다른 ‘카르마’는 심경자의 그림. 옛 여인들의 머리카락 ‘가르마’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무의 나이테를 탁본하고 콜라주한 화면에는 세월의 흐름과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기억의 결들을 ‘카르마’라 명명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자기 안의 시간과 인연을 돌아보게 한다.
최영욱은 달 항아리를 그렸다. 그 표면의 빙열까지, 세필로 정성스레 따라가며 그렸다. 같고도 다른 삶의 균열들이 한 항아리 안에서 잔잔한 결로 합쳐진다. 인연의 축적, 즉 카르마를 시각화한 셈이다.
작가에게 ‘카르마’는 단지 제목이 아니라, 평생 짊어지고 가는 주제이자 업이다. 그림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그림이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의 전통과 현대는 단절이 아닌 축적의 흔적이며, 어쩌면 예술은 그 자체로 업을 짊어진 기록일지도 모른다.
예술이 그러하듯, 우리도 각자 매일 자신만의 카르마를 쌓아간다. 그 사슬을 어떻게 이어갈지는 결국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도덕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인간다움을 지탱하는 마지막 윤리다. 카르마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이며, 삶을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 매체도 표현도 다르지만, 각기 다른 언어로 업의 연쇄를 형상화해 온 것. 어쩌면 그것이 한국 미술의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