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27번째 레터는 9일 개봉한 영화 ‘베러맨(Better Man)’입니다. 제목만 봐선 뭔말하려는지 와닿지 않는데다, 포스터는 침팬지. 첫인상으론 썩 정이 가지 않죠. 그런데, 이 영화, 의외로 공감하실 전기 영화입니다. 별나라 슈퍼스타의 철부지 투정인줄 알았는데 보다 보면 누구나 가졌을 연약한 구석을 돌아보게 되거든요. 90년대 영국 보이밴드 테이크댓(Take That)의 멤버였고, 나중에 솔로로 슈퍼스타가 된 로비 윌리엄스 이야깁니다. ‘나, 테이크댓 모르는데’ ‘로비 윌리엄스는 더 모르겠는데’ 라고 하신다면, 괜찮습니다. 아주 유명한 가수의 전기 영화, 이 정도만 아시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다 말해주거든요. 로비 윌리암스가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자기 자신을 혐오했는지, 얼마나 열등감에 시달렸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대중이 너무 싫고, 무섭고, 지겹다가도 대중의 관심이 없으면 산소가 소멸한 듯 헐떡이는 이중성도 드러납니다. 주인공이 또라이에 난봉꾼이라 “아니 왜 저래?” 하시다가 어느새 이해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수도. 어떤 장면에서 그런지 말씀드려볼게요.
우선 ‘베러맨’의 주인공, 침팬지 얘길 해야겠습니다. 로비 윌리암스라는 영국 슈퍼스타, 돈이 산처럼 많고, 명성은 하늘을 찌르는 사람의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 여러분이 감독이라면 뭘 먼저 고민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주연 배우를 누굴 캐스팅하지?” 이 고민을 먼저 하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베러맨‘은 잘생긴 배우,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아니라 침팬지를 주연으로 캐스팅했습니다. 정확히는 침팬지 CG죠. 실제 배우가 연기하고 외형에 침팬지 CG를 입혔습니다. 이 결정이 관객 백만명은 날렸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보기에 낯설거든요. 흥행을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인데, 작품의 독창성 측면에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로비 윌리엄스가 대중 앞에 선 자신을 침팬지라고 생각해서 침팬지를 내세웠다고 하니까요. 진화가 덜 된, 불완전한, 대중을 즐겁게 해줘야만 존재 이유가 생기는 광대. 그걸 침팬지라는 캐릭터로 보여줍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등장하는 꼬마 침팬지. 로비의 8살 무렵 모습입니다. 애들이랑 축구 하다 골을 못 막아서 찌질이라고 놀림을 당하지만 집에 와선 아빠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함께 부르며 신이 납니다. 남 앞에 서는 거 좋아하고 박수받는 거 즐기는 거. 아빠 유전자에요. 아빠는 아들과 노래할 때 입버릇처럼 “불태우자”(Light’em up)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영화 끝날 때까지 수시로 나옵니다. 자신을 불태우면서 대중의 심장에 불을 지르는 직업이니까요. 불은 아무나 지르나요. 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로비는 그 재주, 끼가 있었어요. 15살에 보이밴드 오디션에 합격합니다. 윙크 덕분에 붙었습니다. 머쓱해서 돌아서 나가다 심사위원(나중에 매니저)한테 윙크를 날렸는데 그걸 보고 매니저가 “저 놈은 뭐가 되겠군” 싶었대요. 윙크 한 번이 인생을 바꾼 거죠. 이 부분은 팩트입니다. 로비 윌리엄스가 인터뷰에서 여러 번 얘기했거든요.
테이크댓 시절, 우리의 침팬지, 로비는 인기에 찌들어가면서 술 마시고, 약물하고, 사고 치고, 말도 아니게 망가집니다. 그러다 밴드에서 쫓겨나요. 21살에 밴드를 탈퇴하고 솔로로 시작하는데 그땐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타고난 승부욕과 복수심.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있었습니다. 로비의 그녀는 ‘베러맨‘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주인공이 배에서 연인을 처음 만나 춤추는 시퀀스에 등장하는 니콜 애플턴입니다. 니콜도 유명한 가수였는데, 로비가 솔로로 설 무렵에 만나 그의 곁을 지켰으나 아이를 유산하고 결국 헤어진 여성입니다.
영화에 묘사된 니콜 애플턴 스토리가 진짜인가 찾아봤는데 진짜더군요. 제가 왜 그렇게까지 궁금해졌느냐하면, 로비 윌리엄스의 많고 많은 여친 중 유일하게 니콜만 영화 마지막까지 중요하게 다뤄지거든요. 어려울 때 만났다는 점도 있지만, 주인공이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그 시절과 화해하지 않고는 후회도 용서도 가능하지 않은 거죠.
니콜이 나중에 결혼한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로비의 숙적(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라는 사실은 참 얄궂어요. 운명의 신은 인간의 삶을 가지고 잔인한 내기를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로비가 마약재활센터에서 중독에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 그가 보고 있는 잡지 커버가 나오는데, 니콜과 그의 숙적이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표지 기사입니다. (영화에서 쓰윽 스쳐가기 때문에 자세히 보셔야 해요.) 나하곤 낳지 않았던 아이를 나의 숙적과 낳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금단의 통증보다 그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을 거 같네요. ‘베러맨‘이 전기영화로 뛰어난 점은 이렇게 주인공이 가장 아픈 상처에 가차없이 환한 조명을 갖다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에서 로비는 내내 자기 혐오에 시달리는데 여기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영향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스타는 타고나야 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노바디, nobody)으로 살아야한다”고 가르쳐요. 이 말은 저주처럼 각인됩니다. “넌 짐승 새끼야, 넌 쓸모없어, 넌 노바디야”라며 조롱하는 로비의 분신이 로비가 공연할 때마다 객석에서 마구 출몰하며 그를 괴롭힙니다. 나중엔 콘서트장에서 분신들과 혈투를 벌이는 장면도 나와요. 누구나 가끔은 그런 때가 있기도 하죠. 나의 못난 모습을 어떻게든 지워버리거나 매질을 해서라도 쫓아버리고 싶다는. 그 점에선 슈퍼스타나 보통사람이나.
영화 제목 ‘베러맨‘은 로비가 자기 혐오와 결별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보시다보면 “거참 배부른 소리 하네”라며 로비가 한심해보일 때가 있으실 거에요. 평범한 회사원 한달 월급을 마약 1회 흡입에 날려버리면서 고통이 어쩌구, 인생이 어쩌구 하니 로비의 절친조차 이해 못 하겠다고 떠나버리죠. 거참 정이 안 가네, 싶어질 무렵에 로비가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평범한 누군가의 일기장에 적혀있을 목소리와도 닮았습니다.
“솔직히 내가 한심해요, 그저 원하던 걸 가진 철없는 놈일뿐인데. 솔직히 너무 창피해요. 명성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배웠는데 나한테는 아무 소용없었어요. 사람은 유명해진 나이에서 멈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난 15살이에요. 거기에서 멈춰서 진화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그러는 거에요. ‘괜찮아, 나 쓰레기야, 그게 어때서.’ 남들이 욕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러는 거죠. 그런 내가 너무 싫어요.”
전 이 고백을 듣고 로비를, 그리고 철없어 보이는 대중 스타들을 조금은 이해해주기로 했습니다. 돈이 산처럼 많고, 명성이 하늘처럼 높은 거 말고는 뭐 별로 다를 게 없잖아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애쓰지 않으면 부끄러운 자신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한 건 마찬가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이중성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기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 책이 제목 덕분에 베스트셀러가 된 거겠지요. 영화 ‘베러맨‘을 보며 자신의 싫은 모습, 못난 모습을 기꺼이 안아주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