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은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문화가 문물에 앞선다고 생각하고 한류의 가치를 십분 인정하는 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은 패를 나누어 대립하지 않고 그를 존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문인협회 시조 분과에서 펴낸 ‘시조 축제’라는 시조집을 보니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중의 봄’, 박정희 대통령의 ‘거북선’,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 단시’가 영문과 아랍어 번역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세 지도자는 문과 무를 함께 숭상하였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9대 성종은 문필력이 뛰어난 유호인이라는 신하를 많이 아꼈다. 유호인이 12년 위다. 그는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고 홍문관 교리, 의성 현령,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다. 공조 좌랑과 검토관도 했다. 조정에서 몇 해째 벼슬을 하던 중 낙향하겠다고 임금께 아뢰자 성종은 시조를 한 수 써 만류한다. 현대어로 고치면 이런 내용이다. ‘있으렴 부디 가겠느냐 아니 가면 안 되겠느냐/ 무단히 섧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달프다 가려는 뜻을 일러라’

왜 낙향하려는지 시조를 지어 이유를 물어보니 유호인은 어머니가 연로하여 돌봐드리러 가겠다고 대답한다. 성종은 그의 고향 선산에서 멀지 않은 합천의 군수 자리가 비어 있어 그를 임명했고, 유호인은 그곳으로 어머니를 모셔와 봉양하다 임종을 지킨다. 세월이 흘러 본인도 49세 때인 1494년에 숨을 거둔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같은 해에 성종도 승하한다.

왕은 석별의 정을 듬뿍 담아 신하에게 네 번이나 묻는다. 안 가면 안 되겠냐고. 참 멋지다. 성종은 홍문관을 육성했고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경연(經筵)을 활성화했으며 사헌부와 사간원 같은 대간(臺諫)의 활동을 보장해주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악학궤범’을 완성한 것도 성종 때였다. 이런 치적도 중요하지만 재위 기간 내내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함부로 벌하지 않아 ‘도학군주’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도학군주, 즉 ‘멋진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것이 나의 헛된 꿈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