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러운 숲을 그린 김욱규의 유화. 그의 대부분 작품에 제목과 서명이 없어 판매 목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김욱규 유족 소장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밝은 색채의 동식물이 빛난다. 주류 미술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자신만의 ‘골방’에서 초현실주의 작품 세계를 지은 화가 김욱규(1911~1990). 그의 1970년대 유화 작품 중 하나다. 화가의 좁은 방에도 실험적인 작업의 즐거움이 그림처럼 빛났을 듯하다.

한국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초현실주의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17일부터 열리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 6인을 소개하는 전시다. 김욱규, 김종남(1914~1986), 김종하(1918~2011), 신영헌(1923~1995), 김영환(1928~2011), 박광호(1932~2000)의 그림 등 300여 점이 나왔다.

그간 한국 초현실주의 작가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전시도 흔치 않았다. 1924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는 국내에선 1930년대 말 김환기, 이중섭 등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시도됐지만, 국난 속에 적극 전개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면’인 작가와 작품이 많은 전시다. 살바도르 달리, 조르조 데 키리코, 르네 마그리트 등 해외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작품과 닮은 듯하면서도 독자적이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초현실주의적 체질을 지녔던 여섯 작가를 통해 한국 미술사를 다채롭게 조명하고자 했다”며 “당시 이들의 작품은 시대착오나 모방으로 간주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질적 존재들이 숨어 있는 김종남의 ‘수변’(1941)./이타바시구립미술관

단색화와 민중미술 등이 주류를 이루던 당대에 외길을 걸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김욱규는 일본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1·4 후퇴 때 월남했다.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다 1970년대부터 두 평 안 되는 방에서 초현실주의를 독학하며 그림 400여 점을 남겼다고 한다. 고독과 불안부터 원초적 생명력까지 시기별로 작품에 다양하게 담겼다.

자화상을 비롯해 울창한 숲과 생물을 화폭 가득히 담아낸 김종남(일본 이름 마나베 히데오)도 있다. 그는 1930년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종전 후 일본에 남아 꾸준히 초현실주의를 해나간 드문 조선인 작가다. 숲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러 생명이 모습을 숨기고 있다. 임종 전까지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았던 개인적 정체성이 그림에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김종하와 대구교육대학 교수였던 박광호는 상대적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활동한 작가다. 김종하의 그림에는 장갑과 마네킹이 자주 등장하고, 관능적인 누드화도 많다. 박광호의 그림에는 신체 부위를 연상시키는 형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당대에 보기 드물게 억압된 욕망과 에로틱한 환상들이 읽히는 작품들이다.

신영헌의 '한의 장'(1969). 바위와 분절된 인간 신체를 결합해 분단된 한반도를 상기시킨다./개인 소장

국내 미술대학 1세대 화가인 김영환과 신영헌도 나왔다. 이중섭에게 그림을 배웠고 달리 등에게서 영감을 받은 김영환의 작품엔 과장된 원근법, 황소와 말 등을 모티프로 한 애니미즘 등이 나타난다. 신영헌은 조국 산천의 모습을 인간 형상과 결합해 전쟁과 분단 현실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초현실주의는 작년 선언 100주년을 맞아 관련 전시들이 국내외에서 이어지고 있다. 모순되는 것들을 예술 안에서 낯설게 왕래시키고 통합함으로써 현실을 변혁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지역적 색깔을 가지고 발전했다. 전시에선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이중섭, 이쾌대, 천경자, 박래현 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열린다. 관람료는 2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