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 /고운호 기자

1970년대 청년 영화의 기수였으며, 1980년대 스타 감독이었던 이장호(80) 감독이 데뷔 50년 만에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인연과 역사적 연관성에 주목한 다큐 ‘하보우만의 약속‘(16일 개봉)이다. 애국가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제목을 따온 ‘하보우만‘은 두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감독의 절절한 사죄와 미래 세대를 향한 간절한 호소가 담겼다. 이 감독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나이 80에 겨우 정신 차리고 이번 다큐를 만들었다”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의 역사를 끝내려면 두 분의 미래 비전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한때 두 대통령을 지독히도 미워했다. 영화 검열관이었던 부친은 신익희 선생을 지지했다. 이 감독은 부친에게 배운 대로 ‘이승만은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친일파에 독재자‘로 알고 지냈다. 1976년 이 감독이 대마초 단속으로 무기한 활동 금지를 당하며 정권에 쌓인 울분도 있었다. ‘별들의 고향‘(1974)으로 데뷔해 흥행의 기운이 몰리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족쇄였다. 3년 뒤에야 활동 금지가 풀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3)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등으로 명성을 되찾았다. 잇따라 흥행 영화를 만들던 무렵, 이 감독은 “영화를 돈이나 명예로만 바라봤다”고 말했다. “관객을 육체로만 생각했던 거죠. 나이 들면서 깨달았어요. 관객의 영혼을 생각해야 한다고요. 그러면서 역사 공부도 하게 됐고, 사실(史實)을 알게 되면서 두 대통령에게 존경심을 갖게 됐습니다.”

1955년 11월 3일 이승만(오른쪽 둘째)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군 3군단을 찾아 예하 5사단장 박정희(왼쪽 둘째) 준장과 악수하고 있다. 다큐 '하보우만의 약속'에서 두 대통령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만남의 상징으로 3번 등장한다. /대한뉴스·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새로운 존경심으로 만든 ‘하보우만‘은 완성까지 1년 6개월가량 걸렸다. 극 영화만 만들다가 다큐를 하려니 자료 확보부터 쉽지 않았다. 김일주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초대 사무총장의 도움을 받아 팩트 체크와 저작권 확을 거쳐 조금씩 완성해 나갔다. 다큐는 지루하기 쉬워 편집을 10번 넘게 다시 했다.

이 감독의 의지로 완성된 ‘하보우만‘은 최근 개봉한 여러 역사 다큐 중에서도 드물게 정제된 연출을 보여준다. 과도하게 선동하거나 과격하게 몰아가지 않고 자료 중심으로 메시지를 차분하게 전달한다. 건국 초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던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 매국노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모두가 반대한 중화학공업 육성을 리더십으로 돌파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여러 사료로 설득해나간다.

특히 두 대통령 사이의 역사적 연결성을 강조한다. 이를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다큐 시작과 중간, 끝부분에 3번에 걸쳐 나온다. 1955년 11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군 3군단을 찾아 예하 5사단장이던 박정희 준장과 악수하는 장면이다. 이 악수가 상징하는 두 대통령의 인연은 1959년 박정희 5사단장이 사단에서 발생한 사고 때문에 전역을 결심하는 때로 이어진다. 휘하 군인 59명이 눈에 파묻혀 순직한 대형 사고였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天災)”라며 박정희 사단장을 원대 복귀시켰다.

또 과거 박 대통령이 남로당 전력 탓에 사형 언도가 불가피한데도 무기형으로 감형하고, 6·25 중 군에 복귀시키고, 장군으로 승진시킨 결정도 이승만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하보우만‘의 김일주 자료감독은 21일 본지 통화에서 “대한민국 발전사를 견인해낸 두 대통령을 연결해 연구해야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내달 초까지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LA 등지를 돌며 ‘하보우만’ 순회 상영회를 연다. 이승만기념사업회 미국 지회에서 초청했다. 이 감독은 “요즘 대부분의 정치인은 개인적인 이익에 매달려 있어 안타깝다”며 “자라나는 세대부터 두 분의 애국심, 국민에 대한 애정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