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말 방송된 TV조선 ‘미스터트롯3’ 톱10 결정전 ‘레전드 미션’ 현장. 미스터트롯 시리즈 역대 최연소 참가자인 2017년생 유지우가 이날 레전드로 나선 가수 조항조에게 말한다.
“4살 때부터 조항조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인생의 절반(?)을 조항조 노래 부르기에 바쳤다는 설명. 유지우는 마스터 예심에서 조항조의 ‘정녕’(2010)으로 올하트를 받았고, 이날도 조항조의 ‘돌릴 수 없는 세월’(2021)을 택했다. 자신의 노래를 소화해 톱 10에 든 지우를 향해 조항조는 “원곡자인 나보다 더 잘 불렀다. 지우군을 보니까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각종 트로트 오디션에서 어떤 노래든 ‘떴다’ 하면 이 가수의 이름부터 찾아봐야 한다. 올해 데뷔 47년 차 가수 조항조(66·본명 홍원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숨은 명곡’들이 다시 회자되며 차트를 역주행하고, 그 스스로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미스터트롯1‘(2020)의 톱7 인생곡 미션에서 장민호가 부른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1997), 김호중의 ‘고맙소’(2017)는 대단한 히트를 했다. 또 이찬원은 지원서에도 ‘좋아하는 가수’로 조항조의 이름을 올렸고, 미스터트롯 1대 진(眞)에 오른 임영웅 역시 경연 전부터 조항조 노래 커버 등으로 이미 팬들을 모은 바 있다.
‘미스터트롯2’에선 최종 진眞에 오른 안성훈이 ‘최대 고비’ 중 하나로 꼽았던 데스매치에서 선곡한 ‘돌릴 수 없는 세월’, 송민준이 부른 ‘정녕’ 등 음악 차트 상위권을 휩쓰는 등 화제성이 높았다. 또 미스트롯3 정서주·배아현·김소연·정슬 등 ‘뽕커벨’ 팀이 부른 ‘후’(2020) 또 ’미스터트롯3′에서 직장부로 나선 에어컨 기사 박지후 ‘인생아 고마웠다’(2022)로 마스터 예심 선(善)을 차지하는 등 방송에 나왔다 하면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항조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깨끗하고 청아한 음색의 유지우군처럼 그 자체로 정화 작용을 하는 후배들이 즐비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내게도 학습의 장이 된다”면서 “십수 년 전에 모 PD분이 ‘노래에 미친 남자’라며 ‘노미남’이란 애칭을 붙여주셨는데, (후배들을 보니) 이젠 ‘노미남’ 정도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날도 서울~부산을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3분여 신곡을 5시간 내내 반복해 들으며 수정하고 또 고쳐 부르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 역시 유지우처럼 서너 살 때부터 ‘동네 가수’로 불렸다. 서울 출신인 그가 엄마와 함께 대구 이모댁에 가는 기차 칸은 ‘꼬마 가수’의 ‘오동동 타령’에 흥으로 들썩들썩했다. 학교 어린이 합창단에서 시작해 미8군 무대까지 노래하는 자리엔 빠지지 않았다.
트로트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팝가수를 동경했던 청년은 1972년부터 각종 언더그라운드 무대 등을 누비다 6인조 록밴드 ‘서기 1999년’으로 1979년 공식 데뷔했다. 30년 가까이 거의 무명으로 살다 생계 때문에 트로트에 도전한 첫 곡이 유명한 ‘남자라는 이유로’(1997). 가수 최진희의 ‘미워도 미워 말아요’를 리메이크한 노래였다. 발라드·재즈·R&B·스탠더드 팝 등 대부분 장르를 섭렵했던 그였지만 트로트는 생소하고 어려웠다. 꺾기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수록 가사를 파고들었다. “남진 선배의 ‘가슴 아프게’ 같은 노래가 대표적이지요. 간결한 멜로디 속에 기승전결 감정선을 다 담아내기 정말 힘듭니다. 나훈아 선배의 가사는 시 한 수 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가 IMF 외환 위기 당시 가장들을 눈물짓게 했다며 뉴스에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후 ‘사나이 눈물’(2001) ‘만약에’(2005) ‘거짓말’(2009)을 비롯해 KBS 드라마 ‘왕가네 사람들’의 OST ‘사랑 찾아 인생 찾아’(2013)를 부르면서 ‘엄통령’(엄마들의 대통령)이란 별명도 생겼다.
그는 저스틴 비버·에드 시런·BTS·지드래곤 등 글로벌 스타들의 노래가 나왔다 하면 바로 ‘플레이 리스트’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요즘에는 후배 작사·작곡가들의 노래를 꾸준히 부르기 위해 매달 한 곡씩 신곡을 발표한다. 후배들의 좋은 곡이 더 많이 불리기 위해서다.
조항조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때가 오게 마련이고, 대가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다만 그 타이밍을 만나기 위해선 타고난 음색이 뒷받침돼야 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단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마치 ‘수도승’이 된듯, 절제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좋아서 하는 것은 힘들어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또 “대중 가수는 마이크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위 후배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노래 역시 화려하게 멋을 부리거나 꾸미는 건 한 순간이라고 했다.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중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목소리로 가사 속 삶을 살아보는 ‘목소리 연기력’이 얼마나 좋은지 여부를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대중 가수라는 설명이다.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것’을 갖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결국 듣는 사람이 얼마나 공감하느냐가 노래의 생명력을 결정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조용필·나훈아 등 제게 노래 교칙본 같은 존재였던 ‘국민 가수’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그저 끊임없이 노력한다”면서 “단 한 명의 팬을 위해서라도 노래할 수 있는 성실한 ‘대중 가수’로 오래 노래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